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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폴라 라훌라 스님(Walpola Rahula, 1907-1997)

지복에 이르는 길..../관련자료

by O_Sel 2008. 1. 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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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불교지성, 월폴라 라훌라 스님



1. 들어가는 말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7-1997) 박사는 스리랑카 출신의 승려였다. 그는 남방 상좌부의 비구 신분으로서 학문과 실천을 겸비했던 이 시대 불교 지성의 대표자였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교육과 포교에 일생을 바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또한 라훌라 스님은 그가 배워 알고 있는 붓다의 교설에 위배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승단 내부에 속한 일이든,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투쟁에 앞장섰던 행동가이기도 했다.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일반적으로 세계적인 석학 혹은 학승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활동으로 보아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학문은 결코 명예나 학위 혹은 학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출가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될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구도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출가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포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관되게 붓다가 비구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당부했던, 그 교훈대로 실천했던 스님이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월폴라 라훌라 박사의 학문적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그가 승려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가를 그의 주요 저술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갖고 추구했던 불교의 이상사회 건설에 관한 그의 사상들은 한국의 불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2. 라훌라의 저서들과 저술 배경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 있던 1907년 5월 9일 스리랑카 남부 갈레에 있는 월폴라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마을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의견 차이로 중도에서 스스로 학교를 그만 두었다. 교장의 부당한 징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부터 이미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의 반항적인 기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13세 때에 출가하여 사원의 교육기관(Pirivena)에서 전통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적인 학문의 정신과 방법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30세 무렵에 비로소 세일론대학교에 들어갔다. 세일론대학교는 1921년부터 1942년까지 영국의 런던대학교의 부속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학사 학위는 런던대학교로 되어 있다.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다수의 중요한 저술들은 남겼다. 그의 저술들은 싱할라 어와 불어로 씌어진 것도 있지만 주로 영어로 씌어졌다. 아마 그의 책이 영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전세계 독자들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책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유통되었고, 일부는 관련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과 그 저술 배경을 살펴보자. 그런데 여기서는 싱할라어로 씌어진 책들은 다루지 않았다.

 

1) <The Heritage of the Bhikkhu(비구의 유산)> (1946)

이 책은 라훌라 스님의 초기 작품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의 초대 총리 세네나야께(D. S. Senenayake)와 몇몇 사람들이 1946년 1월 초순 불교 승려는 국정, 즉 정치활동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것은 스리랑카 불교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스리랑카의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스님들은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이러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해 1월 26일, 꼬따헤나의 프린스 칼리지에서 공식적인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젊은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비구와 정치'(Bhikkhus and Politics)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세네나야께 총리와 그의 추종자들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문을 다시 읽고자 원했기 때문에,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에 관한 자신의 평소 지론을 급히 작성하여 1946년 6월에 <Bhiksuvagu Urumaya>라는 제목으로 싱할라어로 출판했다. 이 책은 출판한지 3주일만에 매진되었다. 그후 2년 뒤인 1948년 제2판 수정본을 내놓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2) <History of Buddhism in Ceylon (세일론 불교사)> (1956)

그 후 라훌라 스님은 세일론대학교에서 세일론 불교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195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인데, 세일론 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스리랑카 불교사 연구를 위한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다.

 

 

3) <Le Compendium de la Super-doctrine (Abhidharma-samuccaya) d'Asanga (無著著 阿毘達磨集論譯註)>


이 책은 불어로 씌어진 것이다. 라훌라 박사는 세일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인도의 캘커타(Calcutta) 대학교에서 저명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이때 대승불교에 정통한 사람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서 대승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한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 티베트어와 중국어로 씌어진 경전들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의 폴 데미빌(Paul Demieville) 교수 문하에서 대승의 유명한 철학자 아상가(Asanga, 無著)를 연구했다. 그때의 연구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원래 무착의 아비달마집론은 범어로 씌어졌으나 유실되고, 한역과 티베트어역만이 남아 있었는데, 라훌라 박사가 최초로 서양어로 번역 소개하였다.

 


4) <What the Buddha Taught(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1959)


이 책은 서양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불교의 기본 교리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씌어진 불교의 개론서이다. 라훌라 박사의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5) <Zen and Taming of the bull(禪과 牧牛)>(1978)


이 책은 그가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에세이와 연설문, 강의록 등을 엮은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선과 목우}는 그가 1975년 4월 9일 런던의 불교도 협회와 1976년 10월 13일 도쿄 고마자와 대학교에서 연설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선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미 상좌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6) <Humour in Pali Literature and Other Essays(팔리문헌의 특징과 다른 논문들)>(1998)


이 책은 월폴라 라훌라 박사의 유고집(遺稿集)이다. 라훌라 박사가 이미 발표한 팔리어와 팔리문헌에 관한 논문 다섯 편과 다른 논문들을 모아 그의 사후 3개월을 기념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팔리어와 팔리문헌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는데 기여한 그의 학문적 노작들이다. 이 책에서 특히 팔리어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비판하고 팔리어는 오직 마가디(Magadhi)였다고 그는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3. 저술에 나타난 월폴라 라훌라의 불교관


앞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저술들 가운데 그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은 <비구의 유산>, <선과 목우>,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등이다. 이 세 권의 저술에 의하면,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현실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적 종교라고 강조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이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은 월폴라 라훌라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붓다는 언제나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라훌라 박사는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하고 독창적인 수행관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붓다가 초기경전에서 언급한 수행법을 바르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수행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상좌부의 전통에 따라 사성제가 붓다의 근본 교설이라고 파악하고, 이 사성제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수행법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이 사제설에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라고 말하고, 이 열반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것을 불교의 전문 술어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고 하는데, 이 현법열반ditthadhamma-nibbana)을 금생에 실현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내생을 기약하는 안이한 수행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열반은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즉 도덕적·정신적·지적인 훈련과 완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본질을 벗어난 명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명상의 본래 의미는 정신수행에 있다. 즉 "명상의 목적은 탐욕 · 증오 · 악의 · 게으름 · 근심 · 불안 · 회의와 같은 불결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마음의 집중 · 직관 · 총명 · 의지 · 정력 · 분석력 · 확신 · 기쁨 · 부동과 같은 것을 닦아서 마침내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을 깨닫는 가장 높은 지혜를 얻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못하는 '제3의 눈'과 어떤 불가사의한 초능력을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명상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필자에게도 남방불교의 명상법, 즉 위빠싸나(vipassana)에 대해 문의해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왜 위빠싸나를 배우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와 같은 초능력을 빠른 시간 내에 익혀 생계의 수단으로 삼겠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불교는 '삶의 방법' 혹은 '생활 방식'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팔정도(八正道)를 바르게 실천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는 팔정도와 삼학(三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계학(戒學), 즉 윤리적 규범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윤리 도덕적 규범은 개인과 사회를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으로 향상시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규범은 보다 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고, 도덕적 기초가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그의 불교관에 의하면, 불교는 결코 염세주의적인 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불교가 염세적인 종교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뿌리깊은 관념들을 일소하기 위해 많은 글을 썼다.


그에 의하면, 불교에서 고(苦)를 강조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교는 비관주의 혹은 낙관주의의 문제가 아니지만, 인생을 완전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은 물론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자유에 관해서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비로소 진실한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생활에서의 모든 즐거움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실로 종교적·도덕적·정신적·지성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다. 불교는 분명히 우울하고, 슬프고, 어두운 마음가짐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오히려 진리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희열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열반의 실현을 위해 계발해야 하는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라훌라 박사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불교가 사회봉사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려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오직 높은 이념, 높은 도덕과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이 있고, 사람들의 사회적·경제적 복지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통탄하리만큼 잘못된 생각이다. 붓다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붓다에 따르면, 진실한 행복은 도덕적·정신적 원칙에 기초를 둔 선도적인 청정한 생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나쁘면 그러한 삶으로 이끌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불교는 물질적 복지 그 자체를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보다 높고 숭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불가결한 것이 곧 물질적 복지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과 신념은 곧 불교의 정치사회철학의 기본이 되고 있다. 그가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직접 투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많은 대중들이 고통을 받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정신적·도덕적 안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인 열반과 불교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에 승려의 정치 참여를 적극 권장했다.


라훌라 박사가 승려의 정치 참여를 권장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역할을 둘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는 인간의 생활과 직접으로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가 종교를 잃게 되면 죄와 악이 판을 치게 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역할 또한 자비·연민·지혜와 같은 특질의 촉진을 통해 도덕적·정신적 인격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정치란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고귀한 봉사라고 이해했다. 불교 또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려의 정치 참여는 곧 불교의 사회봉사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승려의 정치 참여는 출가자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치와 불교, 그리고 비구의 생활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의 견해는 비구들은 국민들의 발전과 복지를 향한 어떠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고, 비구들은 사람들에 의해 마련된 즐거움과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하며,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마음에 두지 낳고, 오직 자신의 구제, 즉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본위의 생활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와 비구의 삶에 대한 엄청난 오해이며,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고귀한 이념을 완전히 못보고 놓치고 있다


비구는 인류의 안녕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행복과 구제만을 생각하는 비겁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다. 진짜 비구는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심사숙고하는 영웅적인 사람, 즉 이타주의자이다. 이러한 비구는 수메다 보살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열반을 포기할 것이다. 불교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언제나 다른 비구들에게 붓다가 제자들에게 권유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안락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했다.


라훌라 박사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비구와 정치'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의 활동이 정치에 속한 것이든 아니든, 비구의 종교적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오히려 비구들의 신분에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비구들의 사회 활동이야말로 비구의 책무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비구들의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정치적·사회적 문제에도 적극 참여하여 불교적 관점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토록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것인가. 그의 저서<{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의 제일 마지막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교는 권력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이 없는 사회, 정복과 패배를 넘어서 평화와 안정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 무고한 자에 대한 박해가 비난받는 사회, 스스로를 이기는 자가 군사적·경제적 힘으로 남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더욱 존경받는 사회, 선이 악을 정복하는 사회, 원한·질투·악의·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물들이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사회, 가장 작은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이 공정 · 이해 · 사랑만으로 취급되는 사회, 평화롭고 조화 있는, 물질적으로 만족되는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가장 고결한 목표인 궁극적인 진리인 열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마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우리 불교도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상좌불교에서 강조하는 불교사회철학의 목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초기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사상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불교에서는 이것이 정토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 즉 정토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여기에서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금생이 아닌 사후, 이곳이 아닌 저곳, 즉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현실 도피적이고 소승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라훌라 스님은 이러한 불교의 이상사회 건설에 장애가 되는 것이면, 그 부당함을 과감히 말하고, 그 시정을 위해 몸소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침묵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한편 라훌라 박사는 상좌부 소속의 승려로서는 드물게 대승불교 철학에도 귀를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는 비록 상좌불교가 붓다의 원형적인 불교임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상좌부의 정통성과 우월성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붓다의 근본적인 교설에는 상좌와 대승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대승불교도들의 편견을 바로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대승불교도들이 상좌불교(Theravada)를 소승(Hinayana)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팔리문헌은 물론 대승의 많은 문헌까지 섭렵하여 상좌불교가 소승이 아니라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그는 상좌불교는 소승도 아니며 대승도 아닌 붓다의 원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국가에는 보살이 없다거나, 모든 보살은 대승불교 국가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지적하고, 성문 · 연각 · 보살은 어떤 특정한 지리적인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성문 · 연각 · 보살 가운데 보살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되지만, 성문은 아라한이 된다고 하여 붓다가 아라한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도 무착의 아비달마집론의 증거를 인용하여 논박하고 있다. '붓다는 곧 아라한이다.'라는 말로 아라한과 붓다는 같은 것이라는 상좌부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곧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는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회통을 시도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학승이었던 빤디따 빙부레 소라따 장로가 발의하여 1966년 5월 9일 세일론에서 '세계불교승가회(WBSC)'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67년 1월 27일 제1차 회의가 세일론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본적인 9개항의 헌장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헌장을 초안한 사람이 바로 월폴라 라훌라 박사다. 그는 이 헌장을 통해 상좌불교도들이 대승불교를 비난하고, 대승불교도들이 상좌불교를 소승이라고 하여 경멸하는 편견을 떠나, 전세계의 불교도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놓았다.

 


4. 맺음말


월폴라 라훌라 박사는 지난해 1997년 9월 17일 입적할 때까지 켈라니야(Kelaniya) 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출가 비구로서 싱할라의 민족 종교인 불교의 발전을 위해 온 정열을 다 바쳤다. 그는 학문적으로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철학 모두에 정통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학문을 통해 확인된 신념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말미암아 불교도는 물론 비불교도까지 그를 흠모하였다.


라훌라 스님은 20세기에 스리랑카의 불교도는 물론 전세계의 불교도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승려상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그래서 그는 이미 생존해 있을 때 전세계 지성인들의 우상이었다.


켈라니야 대학교의 언어학 교수인 까루나틸라께(W. S. Karunatilake)는 추도사에서 "월폴라 라훌라 스님은 불교철학의 일인자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서거로 인한 공백은 아마 절대 메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라훌라 스님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의과대학의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그가 이 땅에 가지고 왔던 육신마저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고 돌아간 것이다.


(마성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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