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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의 개요

지복에 이르는 길..../학술, 교학

by O_Sel 2015. 2. 2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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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강경의 개요

 

* 부처님 열반이후 약 500년이 지나 오면서 아함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다른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에 성립된 경전이 600권이나 되는 반야경이다. 금강경은 600권의 대반야경중 577부에 들어있는 능단금강분을 말하며 기원후 500년 경부터 바즈라체디까쁘랑냐빠라미따쑤뜨라(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란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한문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 혹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줄여서 금강경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로는 간략히 다이야몬드경(Diamond sutra)이라고 하나 정확히 그 의미가 들어맞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다.

 

* 반야부 계통의 경전 가운데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이며, 이 경은 반야부 계통의 다른 경전처럼 분량이 방대하지도 않고 '반야심경'과 같이 간략하지도 않다. 금강경은 또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사상(空思想)을 설하고 있지만 공(空)이란 글자를 전혀 사용치 않으면서도 공의 이치를 유감없이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이 경의 성립시기에 대해 학자 간에 이견을 낳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금강경은 대부분 산문이지만 게송으로 따지자면 300송 분량이므로 후세에 팔천송반야경과 비교하여 삼백송반야경(三百頌般若經)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 참으로 모든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간략하고 가장 심오하며 정교하고 영향력 있는 경전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 와서는 선종의 발현과 더불어 대승경전 가운데 으뜸으로 부각되었다.

 

*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에 있는 바위절벽에 이 경전의 전문이 새겨져 있는데 육조(六祖)시대의 일이라고 전해진다.

 

* 이 경전은 오조홍인(五祖弘忍)이래로 중요시 되었고 육조 혜능이 출가하기 전에 이 경전을 읽는 소리를 듣고 발심했다는 경전이다.

 

* 아무튼 이 경은 인도에서부터 매우 중시되어 왔으며 무착(無着, Asanga), 세친(世親 혹은 天親, Vasubandhu) 등이 이 경과 관련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또 중국에서는 승조(僧肇)를 위시한 수많은 스님들이 금강경의 주석서를 남겼다. 특히 중국 선종에서는 제 5조 홍인(弘忍) 이래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봉독되어 왔다.

(중국 선종사에서 능가경에서 금강경에로의 전환에 따른 사상적인 변환도 연구과제)

 

*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원효스님이 '금강경소'를 저술한 것을 비롯해 많은 주석서가 전해 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금강경은 사교(四敎 : 능엄, 반야, 기신, 원각)의 하나로 분류되어 스님들의 전문 교육기관인 강원의 교재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종파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고 있어 금강경이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

* 현재 한국에서의 금강경은 구마라집 번역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며, 물론 현전하는 산스끄리뜨 금강경이 최초기의 금강경 형태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원전을 바로 읽어볼 수 있어야 한문 금강경의 오류를 밝힐 수 있다. 또한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군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 불교적이며, 숫따니빠따 4장의 가르침과 같은 선상에 있다. 아울러 금강경은 공을 설하신 게 아니고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산야를 극복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경이라고 받아들인다. 공관의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산냐를 뛰어넘는 참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요, 본경 14분에서 설하는바 최고의(parama) 바라밀인 것이다.(각묵)

 

 

 

2. 금강경의 성립시기

 

*금강경은 반야류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반야류의 경전들이 성립된 것은 대개 기원전 1세기 경 부터이다. 기원후 100년 경 부터는 많은 반야류 경전이 쏟아져 나와 서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다가 기원후 3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정리되기 시작 했다.한편으로는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과 같은 다양한 요약본이 나오고 철학적인 특성을 지닌 반야심경과 같은 작은 반야류의 경전들이 나타났다.

 

 

 

(1) 금강경의 반야부 초기 경전설

 

나까무라하지메(中村元) 등은 금강경을 대승불교의 전문적인 술어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반야부 초기경전으로 분류한다. 그의 주장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금강경에서 우선 놀라운 것은 공사상을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한 번도 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볼 때 금강경이 공이라는 술어가 확립되기 전에 성립한 경전임을 입증한다.

 

② 이 경전에서는 소승과 비교되는 대승이라는 개념이 명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다. (대승과 소승의 대립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금강경이 소승과대승의 대립적인 양상이 표면화되기 전에 성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믿음이 열등한 뭇 삶들’ 또는 ‘보살이 되기로 맹서하지 않은 자’ 등에 관해서 언급할 뿐 구체적으로 소승(小乘, hinayana)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승에 대해서도 ‘대승(大乘, mahayana)’이란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최상승(最上乘, agrayana)', ‘최승승(最勝乘, sresthayana)' 또는 '보살승(菩薩乘, bodhisattvayana)'이란 말이 보인다. 그러므로 소승과 대승이란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성립한 경전임을 알 수 있다.

 

③ 그 밖에 경전의 형식이 극히 간소하여 아함경과 흡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보통대승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 모인 대중에 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금강경에서는 간략하게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경전의 구조와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금강경은 대승사상이 정형화되어 고정되기 이전의 청신하고도 생명력이 넘치는 초기대승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후대의 대승경전이 보여주는 현학적인 요소는 찾을 수 없다.

 

④ 금강경에서는 대승불교 특유의 술어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초기불교와 다름없이 설하며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발전한 삼신불사상(三身佛思想)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법신(法身, dharmakaya)이란 단어는 보이지만 빠알리 경전에서처럼 형용사적복합어로 ‘법을 신체로 하는’ 이란 의미를 지닐 뿐 법신불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강경은 대승불교 초기에 형성된 경전이니까 대략 서기 150년에서 200년에 성립한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이 경에는 그 밖에 願이란 용어도 없으며, 대승불교에서 일반화된 육바라밀도 체계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금강경은 대승불교 사상이 일반화되기 전에 성립된 초기 대승경전임을 알 수 있다.

 

 

 

(2) 금강경의 반야부 후기 경전설

 

그러나 콘즈는 아쌍가나 바쑤반두의 정교한 철학적인 주석을 통해 금강경이 얼마나 정교한 대승이론을 전개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감탄한 나머지 금강경을 반야부 경전 가운데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경전으로 적어도 기원후 300년 경 팔천송반야경과 같은 수많은 반야류의 경전의 반야사상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그것을 대중들이 읽기 쉬운 말로 요약해서 만들어진 경전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학자들이 금강경에 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반야부 경전 가운데 초기 경전으로 돌리는데 대한 타당한 반론이 될 수 있다. 공사상이 악취공(惡趣空)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공을 거론하지 않고 공사상을 얼마든지 전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아쌍가나 바쑤반두의 정교한 대승불교 철학적인 금강경에 대한 주석을 읽어보면 금강경이 팔천송반야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과 절대로 무관하게 등장한 초기반야부의 경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반야부 후기경전에서 집착을 부수기 위한 공에도 다시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공을 거론하지 않고 공을 설한 것이 금강경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이 경의 한역으로는 구마라집의 역본(402)이 최초의 번역이다. 한역된 경전의 경우 그 경의 성립시기를 한역되기 100년 전으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즉 기원 전후로부터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 170-270)까지가 초기대승, 용수로부터 무착(無着, Asanga), 세친(世親, Vasubandhu 400-480)까지가 중기대승, 무착, 세친 이후를 후기 대승시대로 분류한다. 그러나 용수의 저작에는 이 경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지 않으며, 경의 내용 중 '후 5백세(後五百歲)'라는 문구가 보이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경의 성립을 대승불교 중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금강경 출현의 사회적인 배경과 몇 가지 살펴볼 점

 

* 금강경은 자신의 성립배경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단서가 될 수 있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과 더불어 사상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1) 불탑 신앙

 

① 탑묘에 대한 신앙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 탑묘(塔墓, caitya 또는 stupa)에 대한 신앙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쌍윳따니까야(SN.Ⅴ.258)와 디가니까야(DN.Ⅴ.102-107)에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의 마지막 여로에서 탑묘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가 등장한다.... 이렇게 탑묘에 대한 부처님의 찬양으로 볼 때 탑 신앙은 매우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불탑신앙은 대승불교 성립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남전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이나 한역으로 전해지는 대반열반경에도 동일한 부처님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는바 사리, 불탑의 공양이 비구들에게가 아니라 재가신자들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불탑공양에는 음악이나 무용등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있어 출가자들에게는 계율에 의해 꽃을 집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탑공양은 출가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가신자의 일이었다. 또한 탑에 공양된 것은 모두 탑용으로 사용하여 탑을 수리하는 비용 등으로 충당되며, 승가에서 소비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불탑의 관리운영이나 공양의 주체가 어떠한 재가그룹에 의해 행해졌는가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비구, 비구니 교단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재가신자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와 같이 불탑의 경제는 출가교단의 그것과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것이 부파교단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부파교단도 이미 확립되어있었던 재가자의 운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당시에도 불탑경제는 승가경제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재가신자의 측에서 말한다면 재가는 불탑을 소유했으며, 그 운영권을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불탑의례의 주체가 되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써 승가나 부파교단은 원래 법(진리)이 중심이나 불탑신앙은 점차 재가자의 부처님에 대한 신앙의 종교로 성립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이 재가자에게 불타의 사리가 봉안된 불탑은 새로운 신앙처가 되었으며, 재가자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대승불교 운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불탑신앙은 대승불교 성립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③ 금강경은 대승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그룹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그룹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대승성립의 기원을 大衆部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파불교시대에 승원의 승려들과는 다른 입장에서의 재가자들의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확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금강경은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흥기의 신앙들과는 다른 모습을 제시하는데 금강경에서는 불탑신앙보다는 법 중심임을 밝히고 있다. 즉 금강경이 있는 곳이 곧 불탑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경전의 공덕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說一切有部에서는 불탑의 숭배를 장려하고 그것에 의해 비상한 공덕이 얻어진다고 설한 반면 化地部, 東山住部, 西山住部 등으로 불리는 부파들은 탑의 숭배는 공덕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면 금강경은 대승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그룹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그룹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④ 금강경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비판적 관점에서 출현한 경전

* 부파불교시대에 특히 불교철학은 지식을 앞세운 승단의 권위를 낳았으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만들어낸 바사론(婆沙論)의 곳곳에서 불상의 조상과 탑묘의 숭배가 커다란 공덕을 낳는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권위 아래서 탑묘신앙은 탑에 대한 공양을 부추기며 부를 축적하는 승단과 공덕을 구하는 불제자들의 탐욕적인 신앙이 맞물려 당시의 인도 불교 현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실천보다는 오히려 교단의 유지, 발전에만 치우쳐 있어, 많은 사회적인 모순을 낳았으리라 여겨진다.

* 탑묘의 신앙을 통해 보시나 선행에 대한 대가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공덕사상은 교단의 권위주의의 증대와 함께 대규모 탑묘의 건설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 보수하기 위하여 불교도들은 자파의 교의 체계를 지키고 전수하는데 몰두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덕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을 부채질하여 보시의 교리를 왜곡시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각하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이러한 부파불교 시대를 금강경의 주석을 달았던 바쑤반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시대가 다가온다. 무명의 성난 파도가 넘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후의 숨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 초기경전인 ⌜디가니까야⌟의 대반열반경(DN.Ⅱ.141)을 보면 고따마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려고 할 때에 아난다와 부처님의 대화에 불탑신앙과 관련하여 중요한 가르침이 등장한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래의 사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의 사리를 섬기는 것을 그만두라. 그대들은 최고선(最高善)을 위해서 노력하라. 최고선을 실천하여라. 최고선을 게을리 하지 말며,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최상의 삶(最上乘)에 들어선 자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삶(最善乘)에 들어선 자들의 이익을 위해 설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아쌍가와 바쑤반두의 주석을 보면 최상의 삶은 곧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상태와 공존하는 최상의 선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최고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 반야사상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종교로서 형이상학적이고 아비달마적인 부파불교철학이 전성하고 사회적으로 화려한 불탑신앙으로 꽃을 피우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의 사백년간의 이러한 인도의 사회적 교단사적 상황 속에서 잉태된 것이며, 금강경은 당대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부처님의 원래의 불교적인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비판적 관점에서 출현한 경전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2) 보살 사상

 

① 보살( bodhisatta(빨리), bodhisattva(산스))이란 말의 성립

 

* 보편적으로 학자들 간의 견해는 불전문학의 대표격인 쟈타카(Jataka, 본생담, 언제쯤 성립된 것인지는 결정하기 어렵지만 BC 1 세기경에는 상당히 보급되었으며 늦어도 BC 2 세기 중엽 이전에 성립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봄)나 보살이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는 조각, 그리고 파알리 불전 또한 상좌부 보살의 개념은 BC 100년 까지는 상당히 보급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보편적으로 BC 2 세기로 보고 있음.

 

* 불전문학에서 주인공으로서의 보살은 이미 수기를 받아 성불이 결정되어 있는 보살, 즉 후일의 석존이 되는 보살이다. 한 사람의 보살이며 과거형 보살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보살은 성불을 향해가는 보살(완전히 깨달은 부처가 아닌 보살), 또한 나아가서는 단지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을 의미한다. 특히 후자는 성불이 결정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수기도 받지 않았으며, 물러서는 일도 있는 범부로서의 보살이며 여러 사람의 보살, 현재진행형의 보살이다. 대승경전에 보현, 문수, 관음 등의 대보살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름 없는 수행자로서의 보살이 설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무명의 수행자가 보살로서의 자각을 일으키는 예는 부파불교 불전 문학의 보살행 찬탄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불전문학은 부파불교에서 생겼으나 점차 부파불교를 초월한 사상으로 발전하여 대승의 흥기를 고취하였으며, 그 핵심의 하나에 대승 보살사상이 위치하고 있다.

 

 

② 대승 보살의 의미

 

보살이라는 복합어의 보디(bodhi)는 ‘깨달음’ ‘正覺’이라는 한 가지의 뜻을 가질 뿐이지만, 사트바(sattva)는 다의적인 말이다. 그러므로 보살이라는 말의 의미가 문제가 될 때는 사트바를 어떠한 의미로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셈이다.

 

* 사트바의 몇 가지 의미

a. ‘본질’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정각을 그의 본질로 하는 사람’ 이다.

b. ‘有情’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정각을 얻어 고요해진 유정’ ‘정각을 구하고 있는 유정’ 이다.

c. ‘마음, 결의, 지원, 정신’의 의미, 보살은 ‘그 마음, 지원이 정각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다.

d. ‘태아’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정각을 이루지 못한 잠재적이고 미발전된 사람’ 이다.

e. ‘의식, 예지’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잠재적 예지의 인격화’이다.

f. ‘헌신’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정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 이다.

g. ‘용기’의 의미, 그러므로 보살이란 ‘정각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가는 사람’ 이다.

 

 

③ 금강경에서의 보살

 

*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재가자가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전문적인 출가자보다 일반 재가자들을 위해 설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것은 남녀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선남자뿐만 아니라 선여인 역시 평등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보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금강경의 보살사상은 남녀의 불평등한 차별이 전제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선남자 선여인은 승, 속의 이분법적 대립과는 무관하다. 즉 승속에 관계없이 발심하여 보살도를 실천하는 선남자 선여인이라면 누구나 대승보살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을 보살과 혼용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보살사상의 탄생은 불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이며, 그리고 그 전환의 정점에 서 있는 대승초기의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 무비스님은 ‘조계종은 선을 표방하고 있어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 이 시대를 선도할 종교로서의 소의경전으로는 부적합하다. ... 금강경은 초기의 대승경전이어서 대승불교가 활짝 핀 시대를 포괄하지 못했다. ... 금강경에는 대승의 보살 정신도 부족하다. ... 조계종은 선불교다 혹은 통불교다라고 할 정도로 가늠되지 않고, 밀교적 성격도 있고, 통불교적 성격에 가깝다. ... 불교가 할 일은 보살행인데, 금강경에는 다른 경전에 비해 미비하다’고 강조하면서, 시대정신이 담긴 소의경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 공사상

 

① 대승불교는 반야 공사상에 기초하여 사상이 발달했으며, 반야경은 대승불교 전체에서 볼 때 역사적, 사상적으로 토대가 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 반야경은 600부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군으로 대승불교 경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며, 또한 대승불교 전체에서 볼 때 역사적, 사상적으로 토대가 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는 반야 공사상에 기초하여 중관, 여래장, 유식, 밀교 등의 사상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반야 공사상은 대승불교 전반을 지탱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공을 뜻하는 개념적인 지각의 부정,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음(無住), 모습을 취하지 않음(不取相)등은 진정한 공의 면모를 보여준다.

 

② 공(空. sunnata)에 대한 사상은 초기불교와는 관계없이 대승불교에서 개발한 이론은 아니다.

* 공에 대한 사상은 초기불교와는 관계없이 대승불교에서 개발한 이론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체르바스키(Stcherbatsky)는 ‘공이란 용어는 대승불교의 창안이다. 그러한 혁신은 철학적 발전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그 싹은 소승불교에서도 보이지만 대승불교가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라고 주장했다.

 

* 공사상이 대승불교 창안물이라는 사실은 연기(緣起)와 공(空)을 일치시킨 용수(龍樹)의 연기해석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다.

 

* 초기불교에서도 이미 연기와 공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중도사상과 더불어 심오한 공사상을 전개시켰다. 연기 자체가 일반적으로 공성(空性)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SN.Ⅱ.267)의 진술로 보아 틀림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여래가 설한 모든 경전은 심오하고 뜻이 깊고 출세간적이며 공과 상응하는 것이므로 그것들을 설할 때는 우리는 잘 듣고 귀를 귀울이고 슬기로운 마음을 내고 파악되어야 하고 통달되어야 할 이 법에 관해 사유하리라.’라고”

여래가 설한 모든 가르침은 그의 깨달음인 연기설(緣起說)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공(空)과 상응하는 것, 즉 공상응성(空相應性)이란 것은 곧 연기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임에는 두 말할 나위조차 없다. 금강경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공성상응의 연기법이다.

 

* 초기경전인 쌍윳따니까야(SN.Ⅳ.54)에 따르면 금강경에서 이러한 자아와 관련된 지각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고유한 공사상을 전개시킨 것이다.

“아난다여, 자아와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은 공(空)하므로 세계는 공(空)이라고 불리운다.”

 

* 붓다고싸(Buddhaghosa)는 ‘무아에 대한 명상과 공에 대한 명상은 같은 의미이면서 문자만이 다르다.’고 했다. 이처럼 무아와 공의 개념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무아의 무실체성이 공의 개념의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전재성)

 

 

 

(4) 후오백세(제6분, 제14분)에 대하여

 

수많은 대승경전 중에 “여래의 멸후, 후오백세에 정법이 멸하려고 한다”는 표현이 보인다. 후오백세라는 것은 불멸후 정법이 계속된다고 보이는 천년간 중에서 제2, 다시 말하면 후반의 오백년이라는 의미이다. 여인의 출가(비구니교단의 설립은 부처님 성도 후 5년 즉 B.C 423년)로 말미암아 정법이 천년에서 오백년으로 줄었다는 설은 많은 경전의 기록에 보인다. 그것이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보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일부 학자들 간에 대승경전의 출현의 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여간 ‘정법 오백년’이란 설이 예부터 있었기 때문에, 오백년 후에야말로, 정법의 호지를 위해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생기고, 이러한 표현이 대승경전에 나타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후대가 되면 “大集經”의 五五百世說이나 正法천년, 像法천년, 末法일만년이라는 三時說이 발전하게 된다. 특히 후자에는 갖가지 셈법이 난입하여 역사적 감각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들의 연원에는 ‘오백세’가 있으며, 이 오백세설에는 어느 정도의 역사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금강경이 지혜를 설하는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리불 존자대신에 수보리 존자를 선택한 이유.

 

* 금강경에서 선택한 경전의 주인공은 쑤부띠(Subhuti)이다. 그를 수보리(須菩利)라 음역하고 ‘선현(線現)’, 선길(善吉), 선실(善實), 묘생(妙生)등 여러 가지로 의역한다.

 

* 그는 자애의 명상(慈愛禪. mettajhana)을 닦아 거룩한 님(阿羅漢)이 되었다. 그는 법을 가르치는데 차별이나 한계가 없었으며, ‘평화로운 삶을 사는 최상의 님(無爭第一)’ 그리고 ‘보시할 만한 가치있는 사람들 가운데 최상의 님’이라고 불렸다. 그는 탁발할 때 집집마다 그곳에서 자비의 명상을 닦았으므로 그에게 주어지는 보시는 위없는 공덕을 낳았다.

금강경은 자파의 교의가 옳다고 분쟁에 휩싸인 당대의 불교계의 현실을 지양하기 위해 쑤부띠의 ‘평화로운 삶’을 제시하고, 공덕을 쌓아 욕망을 일으키는 보시보다는, 자비에 의한 보시를 강조하기 위해 쑤부띠의 ‘자비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경전에서 정법의 괴멸에 관해서 자주 언급하면서 초기경전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쑤부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불교계의 혼란상을 교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극복해보려는 반야부 경전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아마도 단순히 반야 즉 지혜를 강조하려면 지혜제일(智慧第一)이나 법의 장군(法將軍)이라고 불리었던 싸리뿟따(Sariputta)가 경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하는데 쑤부띠가 지혜를 논하는 금강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금강경이 탑묘신앙의 모순을 극복하고 지양하려 했던 최고선이란 바로 쑤부띠의 평화로운 삶과 자비의 삶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승 불교의 보살 즉 깨달음을 향한 님이 실천해야 하는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6) 6바라밀 중 보시바라밀(제4분, 제14분)과 인욕바라밀(제14분, 재28분)을 설한 이유.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수행체계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초기불교는 소위 ‘37조도’라고 하여, 4염처, 4정근, 4여의족, .... 있는데, 그 중에서 8정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6바라밀과 10바라밀이 있는데 6바라밀이 대표적이다.

8정도와 6바라밀을 비교해보면 ① 정어, 정업, 정명은 지계바라밀에, ② 정정진은 정진바라밀에, ③정념, 정정은 선정바라밀에, ④정견, 정사유는 반야바라밀에 상응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 보시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은 초기불교의 수행덕목에는 없고 대승불교의 수행인 6바라밀에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금강경은 바로 대승불교의 선구적인 경전의 하나이므로, 이 두 가지 바라밀에 대하여 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 금강경은 像에 대한 숭배를 부정

 

* 또한 금강경에서는 위대한 사람의 외형적인 특징 즉 상호(32상 80종호)에 대한 숭배를 뛰어넘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징을 갖춘 것에는 허망함이 있고, 특징이 아닌 것을 갖춘 것에는 허망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징이 아닌 특징을 통해서 여래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승불교 출현 당시의 탑묘에 대한 신앙뿐만 아니라 불상에 대한 신앙이 잘못된 공덕사상을 유포하는 폐해를 낳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사상이지만 그 배후에는 대승의 진리의 몸인 법신불(法身佛)에는 형태가 없다는 심오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8)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초기불교의 삶을 타락한 시대상황 속에서 다시 구현하기 위해 금강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인 표어가 바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초기불교에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말은 있어도 거기에 다시 ‘위없는’라는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없다.

 

 

 

4. 금강경의 구성

 

'* 금강경'은 상(1-16), 하권(17-32)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금강경'은 표현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므로 승조(僧肇)는 '금강경소'에서 전반은 중생공(重生空) 후반은 법공(法空)을 설했다고 했다.

또 천태지의와 길장(吉藏)은 중설중설(重說重說)이라고 하여

전반은 전회중(前會衆) 후반은 후회중(後會衆), 또 전반은 이근(利根), 후반은 둔근(鈍根)을 위하여 설한 것으로 보았다.

 

* 불멸 후 약 900년경 무착이 '무착론(無着論)' 2권을 짓고 '금강경'을 총 십팔주위(十八住位)로 과판(科判)하였다.

 

* 또 그의 친동생인 세친은 이 무착론을 토대로 다시 27의(二十七疑)로 분류하는 '천친론(天親論)'을 지었다.

 

 

 

※ 18住處說

無着菩薩은 金剛般若論에서 18住處說을 주장하였다.

(無着菩薩이 金剛經에 등장하는 話題를 18段階로 구분하면서, 根機가 성숙하여 짐에 따라서 각 단계가 점점 상승되는 보살의 수행 단계를 나타낸다)

第1發心住, 第2波羅蜜相應住, 第3欲得色身住 ....

※ 27疑斷說

세친보살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논석에서 2분에서 4분까지 주요한 문답이 끝난 뒤에, 수보리 존자에게 일어나는 의심을 부처님께서 끊어주기 위하여 27가지 話題가 등장한다고 한다.

주문답은 2분에서 4분까지로 본경을 이끄는 주요한 문답으로 본다. 즉 제2분에서 수보리 존자의 질문이 있고, 부처님의 대답은 3분에서 ‘降伏’에 대하여 말한 부분과 4분에서 ‘住修’에 대하여 말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제1疑는 제5분의 내용이다.

제4분에서 ‘경계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하라.’는 말씀에 ‘부처를 구하여 보시하는 것은 상에 메이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해 제5분에서 ‘저 대인상을 보고 여래를 알아 볼 수 없다.’라고 하여, 이러한 의심을 끊어 준다.

 

2) 제2疑는 제6분의 내용이다.

제4분에서 ‘대상에 메이지 않는 보시를 하라’고 하였고, 제5분에서 ‘대인상을 보고 여래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인과가 깊은 데도 이러한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해, 제6분에서 ‘500년이 지난 후세에도 이 말을 듣는 자는 참다운 믿음을 낼 것이다.’라고 하여, 이러한 의심을 끊어 준다.

 

3) 제3疑는 제7분의 내용이다.

위 제4분의 말씀에 대해서 ‘상없이 어떻게 법을 설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해, 제7분에서 ‘여래는 깨달음을 얻은 바도 없으며, 설법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하고, 제8분에서 ‘물질로 보시하는 것 보다는 금강경으로 보시하는 것이 더욱 복덕이 크다’라고 하여, 이러한 의심을 끊어 준다. .......

 

* 중국 양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501-531)가 다시 이를 32분절로 구분해서 오늘날까지 금강경의 분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4. 금강경 번역본 과 주석서

 

(1) 금강경의 번역본

 

'금강경'은 세계 각지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는 경전으로 범어 원본 외에 한문과 티벳 번역은 물론 중앙시아어로도 번역되었고, 19세기에는 영, 불, 독의 3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① 한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6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경전 이름 번역자 번역시기

금강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 402년

금강반야바라밀경 보리유지 509년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 진제 562년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 1권 달마급다 590년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1권 현장 648년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1권 의정 703년

 

* 전체적으로 구마라집 역본은 축약번역과 의역을 한 곳이 많다. 그러나 현장 역본은 구마라집 역본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 여섯 역본 가운데서는 가장 분명하게 직역을 하고 있다.

현장 스님은 다른 다섯 분들보다도 현존하는 범본과 일대일 대역에 가까울 정도로 직역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문이 모국어인 현장스님의 <금강경> 번역본보다는 한문이 외국어인 구마라집 스님의 역본이 훨씬 더 많이, 아니 거의 전부에 가까울 정도로 절대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것은 왜일까? 구마라집 스님은 원전에 충실하기 보다는 한문 문장 자체에 더 치중하여서 한문이 가지는 특성을 맛깔나게 살려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역출신인 구마라집 스님이 외국어인 한문을 가지고 이렇게 유려한 번역을 해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나집 문하의 4철(四哲)이라 불렸던 승조 스님 등 네 분 스님들을 위시한 중국 불교사의 천재들이 팀을 이루어서 역경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분들이 혼을 불어넣어 행한 구마라집 역본의 위대성은 큰 감동으로 접하고 있다.

 

* 그런데 금강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연대는 문헌상에 보이지 않고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권4에 보면 신라 진흥왕 26년(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이 불교의 경전과 논장 등 1,700여 권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진흥왕 37년(576)에 안흥법사가 구법차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능가경', '승만경'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때를 전후하여 '금강경'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효스님의 '금강반야경소' 3권이 있는 점 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글로 시도된 번역은 조선조 세종 때 시작하여 성종 때에 완성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라는 번역본이 있고, 세조의 명으로 한계희(韓繼禧), 노사신(盧思愼) 등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와 '금강경육조언해' 등이 있다.

 

* 현재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금강경 오가해(부대사, 육조 혜능스님, 규봉 종밀스님, 예장 종경스님, 야보 도천스님)는 함허스님께서 편찬(편집하여 설의를 달은 것)하였다. 함허스님(1376 - 1433)은 조선시대 무학스님의 제자이며, 문경 대승사에서 반야경을 세 차례 강의하였고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2) 금강경의 주석서

 

이 경에는 예로부터 8백여 가지의 주석서가 있다고 한다. 단일경전에 대한 주석서로는 그 수에 있어 단연 으뜸이다. 또 그 주석가를 보면 교가(敎家), 선가(禪家)는 물론이요 유가(儒家), 도가(道家)들마저 있어서 그 학구 범위의 방대함은 실로 경탄치 않을 수 없다. 이 경의 주석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듯이 이미 인도에서의 찬술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중국,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7세기경부터 이경에 대한 주,소류가 저술되기 시작하여 명치시대에 이러면 이미 그 수가 100여 종에 이러게 된다.

 

① 인도에서 찬술된 주석서로 한역된 것은 다음과 같다.

<원저자> <저서명> <번역자>

무착 금강반야바라밀경론 2권 달마급다

무착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 1권 의정

세친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3권 의정

천친 금강반야바라밀경론 3권 보리유지

공덕시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2권 지바하

 

② 중국에서 저술된 것으로는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374-414)에 의해 '금강반야경주(金剛般若經注)' 1권을 위시해서 수나라의 지의(531-597)가 '금강반야바라밀경의소' 4권을 썼고, 그 이후 당, 송, 원, 명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禪), 등 모든 종파의 학승들에 의해 많은 주석서가 나왔다.

 

③ 우리나라의 경우는 원효이래 다음과 같은 주석서가 나왔다.

 

<저자> <저서명>

원효(618-686) 금강반야경소 3권

경흥(681-) 금강반야경료간 3권

태현(753-) 금강반야경고적기 1권

함허(1376-1433) 금강경설의 1권, 금강반야참문 2권

혜정(1685-1741) 금강경소찬요조현록 1권

연담(1720-1799) 금강경사기 1권

인악(1746-1796) 금강경사기 2권

긍선(1767-1852) 금강경팔해경 1권, 금강경팔강요기 1권

 

*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중국에서 역경작업이 완료되면서 엄청난 분량이었음에 틀림없는 불교 산스끄리뜨 필사본들은 대부분 산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서구인들의 관심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네팔과 간다라 지방과 중앙아시아 등에서 범어불전들의 필사본이 발견되고, 티베트장경에 포함된 범어불전들의 티베트 음사본들이 연구됨에 따라 적지 않은 범어불전들이 속속 출간되게 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 길기트 지방에서 발견된 범어불전 필사본들은 1956년에 전9권(4 Vol.s 9 Parts)으로 출간이 되었다. 이는 대승불교 2000년사에서 가장 기념되어야할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60년부터 인도의 미틸라 연구소(Mithila Institute)에서는 그간에 출간된 범어불전을 모아 Buddhist Sanskrit Texts로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24권, 크라운판으로 일만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데와나가리(Devanagari) 문자로 출간된 이 범어불전들은 지금 랑카스터(Lewis R. Lancaster) 교수의 주재 하에 로마나이즈화 작업이 마무리 되었고, 미국의 서래대학(University of the West)이 이것을 인터넷을 통해 무상으로 공개하고 있어서 관심 있는 학자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고 있다.

역자가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과 구마라즙 번역본과 현장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450여 쪽으로 번역해낸 《금강경 역해》의 범어 원문은 미탈라 연구소 교정본으로는 단지 17쪽 정도에 지나지 않는 분량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범어불전을 중국의 주요 번역과 비교하여 비판적인 관점으로 번역해낸다면 그것은 500권이 넘는 분량이 될 것이다. 고려대장경을 완역한 동국역경원의 한글대장경이 313권인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실로 굉장한 분량이다. 이처럼 세계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범어불전에 대한 관심과 이해정도는 아주 높으며, 대승불교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한역 경들이나 티베트 경들을 범어원전과 비교해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대세로 자리매김하였다. 대승불교 국가인 한국도 범어불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범어불전을 토대로 한 새로운 차원의 역경불사를 진행해야 세계의 주류불교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과 작업도 없이 부르짖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티베트는 7세기 손첸캄포 왕 시대에 범어불전들을 티베트말로 옮기기 위해서 그들의 문자를 창조해내었다. 그렇게 해서 번역되기 시작한 티베트 장경은 지금 티베트 민족의 자존심 그자체이다.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체계로 된 삼장을 보존하고 있는 티베트불교는 중국불교에 휩쓸려 들지 않는 그들만의 불교로 세계불교의 흐름에 당당하게 동참하면서 세계의 대승불교를 인도해가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실력으로 범어불전들을 중국의 주요번역들과 비교하여 비판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대장경으로 번역해낼 때 원효 스님 이래 추구해온 자주불교가 비로소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중국불교, 티베트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며, 세계불교의 주류로 당당하게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각묵)

 

출처: http://cafe.daum.net/sjm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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