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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대상 실천부문 대상 수상한 청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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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대상 실천부문 대상 수상한 청전스님]

 

나의 종교는 민중, 민중이 부처요, 예수입니다

 

청전스님은

 인도 다람살라에서 28년 간 수행중인 달라이라마 제자로

 1977년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인도 다람살라와 라다크 지역에서 ‘산타클로스 스님’으로도 알려진 청전 스님은

지역민들에게 꾸준히 보청기와 의약품 같은 생필품을 보시하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은 부와 권력을 뺏고 뺏기는 역사를 반복해왔다. 그런데 이런 욕망을 초월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부처님이다. 욕망 추구가 극대화된 현재,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부처님의 길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

바로 청전 스님(淸典, 63)이다. 청전 스님은 히말라야 6개 산맥과 세계 60여개 나라를 신발 한짝에 의지해 떠돌고 있는 구도자다. 청전 스님은 34세에 인도 성지 순례에 나섰다가 달라이라마를 만나 영감을 얻어 주로 다람살라와 라다크 일대에서 29년째 수행과 빈민구호 활동을 하고 있다. 청전 스님을 8월 9일 서울 정릉의 흥천사에서 만났다. 만해대상 수상 차 잠시 귀국한 틈을 탔다.

 

민중이 곧 참스승이자 부처


히말라야 오지인들에겐 청전 스님은 ‘산타클로스 몽크’로 불리고 있다. 스님이 인도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빼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들을 다니며 보시행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청전 스님이 주로 가는 지역은 인도와 중국 접경 지역인 라다크와 잔스카르, 스피티 지역이다. 이 지역은 그 옛날 각각의 왕국이 있었을 만큼 넓다. 그러나 워낙 고지대인 만큼 마을이 수킬로씩 떨어져 있다. 당연히 병원도 약국도 학교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1년 중 절반가량이 눈과 얼음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삽니다. 날이 풀리는 여름이면 지프차를 빌려 한국에서 보시 받은 영양제와 치료제 등 약품과 돋보기, 손톱깍기, 시계 등의 생활필수품을 싣고 떠나요. 제가 라다크에 도착할 때면 라다크 지역민이 아닌 이들도 멀리서 찾아옵니다. 보청기 등이 절실히 필요해서죠.”
오지에서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청전 스님이 오는 날만을 학수고대한다. 청전 스님은 각 마을에서 스님과 주민들 한 명 한 명의 병명을 듣고 거기에 맞는 약품을 전해준다. 시력이 약한 노인들에겐 돋보기와 시계를 준다. 청전 스님의 그런 보시 여행이 연차를 거듭해가면서 그 지역에선 청전 스님이 약을 주면 모두 낫는다는 믿음까지 생겨 ‘의사 스님’으로 까지 불린다. 마을에 초등학교를 지어주고 우유를 구하기 힘든 가난한 마을에는 요기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젖소를 사줬으며 겨울에도 채소를 먹을 수 있게 온실도 짓고 있다. 그렇게 청전 스님은 29년을 살아왔다.

“힘들게 나에게 오는 이들이 모두 나의 참스승입니다.”
청전 스님은 민중, 사람이란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름 없는 많은 민중이 스승들이 달라이 라마 못지않게 오늘날 자신의 수행과 행복을 이끌어 줬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버려지는 낡은 시계, 오래된 보청기를 수리해 이들에게 건네줍니다. 한국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들을 이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또 사용합니다. 이를 보면 물질에 대한 만족과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구나를 느껴요.”그렇기에 청전 스님은 자신을 가르친 참스승이 이름없는 민중들이이라고 말한다.

“유럽이든 어디든 가서 강연할 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제 종교가 무엇이냐구요. 저는 불교가 아니라 ‘피플, 민중’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개개인은 마치 지옥에 사는듯하다”며 “물질적으로 보면 사실 지옥은 인도의 오지인데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게 좋고 만족하는 극락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에게 다람살라의 거처가 더욱 편한 이유다.

스님은 수행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 결국 타락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사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그 창시자들의 가르침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병든 사람을 베푸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는 어떻습니까. 종교가 교조화되기 시작하면 예외없이 군림합니다. 성직자들이 대놓고 보시, 기부를 강효합니다. 종교는 어렵고 힘들고 소외받는 사람, 아프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진제공=전제우 한국불교사진협회장

 

종교, 돈벌이 수단 전락 막아야

 


스님은 또 종교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보이는 종교계의 행태는 종교가 아닌 ‘비즈니스’라는 혹평도 덧붙였다.

스님에 의하면 다람살라에는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려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근래는 달라이라마의 법회뿐만 아니라 직접 티베트를 불교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작게는 몇 개월에서 많게는 수년을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스님들과 학자들이 있지만 이들 중 이름만 올려놓은 이들도 적지 않다.


스님은 “체재 중에 한국에 다녀오며 다람살라에는 이름만 올려놓은 뒤 이후 한국에서 무슨 ‘증’을 따고 온 마냥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며 “진짜 수행자라면 티베트 불교이건 한국불교이건 상관없이 실천이 중요하지 않나”고 비판했다.

또 스님은 “최근 티베트의 젊은 린포체들이 한국에 와 의식을 하고 돈을 요구한다고 한다. 아무리 환생한 스님이지만 아직은 한참 수행해야 할 이들에게 관정을 받겠다고 수백명이 몰린다”고 탄식했다.

“한국의 불자들도 그렇습니다. 티베트의 관정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실천을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스승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면 굳이 관정을 받을 필요가 없지요. 일생을 수행해도 모자란 수행길은 내던지고 티베트 불교의 예식을 왜 하는지요. 이런 풍토에 아예 초청 단계부터 기획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게 어디 종교입니까. 비즈니스지...”  그렇다면 스님이 보시하는 물품은 어떻게 마련될까. 스님은 자발적인 불자들이 십시일반 돕고 있다고 밝혔다.

“가령 시계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버리다시피 하는 것들이에요. 조금만 손을 보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보청기 또한 구형이지만 이들에게는 소중한 것이지요. 이처럼 조금만 마음을 내면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나누어 함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이런 마음으로 종교계가 철저히 청정성 유지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을 찾을 때마다 눈에 띌 정도로 종교계가 급격히 변하고 개탄했다.

“물질주의에 빠져드는 것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성직자들이 너무 민중 위에 군림한다. 가진 자, 힘센 자와 결탁해 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종교입니다. 그 어느 세상 그 어느 시기보다 더 종교가, 성직자들이 먹고사는 직업의 일환이 되어버렸어요. 성직자는 봉사자인데 교리를 팔아 배를 채우고 있어요.”

스님은 “종교의 사명은 항상 ‘지금 여기’여야 한다”며 “‘나중에 저기’를 파는 이들이야 말로 이 시대 가장 큰 사기꾼”이라고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야당 성격, 쓴소리 낼 땐 내야

 

스님은 비판과 함께 스스로를 ‘야당 성격’이라고 규정했다. 부조리를 본다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또한 수행자의 면모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님의 모습은 젊어서부터 이어져 왔다. 당초 교사가 꿈이었던 스님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당시 교내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학교가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수사관들도 간첩 조사를 위해 스님을 연행했다. 스님은 그 과정에서 학생을 보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앞장서야 할 교수들의 행태에 실망했다고 했다.

“결국 좋은 선생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자퇴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나마 가톨릭이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에 진학한 스님은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그 곳에서도 강제로 끌려가 유신 찬성에 표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제대 후 스님의 삶의 방향에 대한 갈음은 더욱 커져갔다.

“신학대 3학년 때 우연히 <선가귀감>을 보았어요. 여기서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서산대사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습디다. 물어 물어 송광사 방장이신 구산 스님을 찾아 뵜는데 스님이 보시자마자 ‘전생에 천축국 구법승이 어째 찾아왔는고’라고 하시는 거예요. 무언가 가슴에 뭉클 와닿았습니다. 그날 이후 고민하다 결국 머리를 깎았죠.”

1977년의 일이었다. 스님은 부조리에 대한 종교계의 활동에 전두환 대통령 당시의 일도 회고 했다.

“이전부터 조찬기도회가 만들어졌어요. 개신교계에서 정치권에 잘보이기 위해 하는 것을 전두환 당시 불교계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중들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처럼 각종 사안에 목소리를 높였던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 있던 법정 스님과도 남다른 인연을 쌓았다. 스님은 사중에서도 소위 주의대상이었다. 법정 스님은 혹여 사중에서 스님이 오해를 받을 때 해명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스님은 뛰어난 식견으로 사회 현안마다 청량함을 주었던 법정 스님과 서서히 닮아갔다.

“법정 스님이 ‘이게 없으면 죽는다’는 것만 빼고는 갖지 말라하셨어요. 그런데 하루는 가사 장삼을 주시더군요. 승려로서 이 것만은 필요하다구요. 그 가사를 인도에서 40년 넘게 입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준 가사장삼은 스님의 유일한 소유물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후 구름처럼 물처럼 운수행각을 했다. 스님의 이런 삶은 남지심 선생의 소설 <우담바라>의 주인공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종교인은 솔직하고 인간적이어야

스님은 수행과정에서 떠오른 의문들을 제대로 풀기 위해 1987년 동남아 불교국가로 순례를 떠났다. 여기서 테레사 수녀를 비롯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될 달라이라마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 ‘성적인 충동이 일어날 때가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선방에서도 큰 스님들에게 여쭸을 때가 있었어요. ‘이놈아, 한 생각 돌이키면 된다’고 했죠.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습니다. 달라이라마는 당황할 만한 질문인데도 ‘내게도 성적 충동이 일어날 때가 있다’고 많은 대중들 앞에서 말하더군요. 다만 달라이라마는 여기에 ‘그런 위기가 오면 불제자로서 간절히 기도하며 극복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담대하다고 생각이 들며 존경심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스님이 인도에서 29년을 살게 한 계기였다. 스님은 돌아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1988년부터 다람살라와 라다크 일대에서 수행에 들어갔다.

스님은 “출가정신은 불법에 대한 확신”이라며 “달라이라마를 가까이서 보며 확신했다. 승려에게 이런 확신이 없으면 결국 명예욕, 물욕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살면서 존경하고, 또 감동받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처음 만나는 자리에 깨끗하게 차려입고 갔는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오더라구요. 법회 때는 단상보다는 대중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요. 솔직하고 인간적입니다.”

청전스님이 인도에서 보내는 일상은 한국에서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스님은 다람살라 도서관 인근에 작은 방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 명상하고 티베트 절 30분, 간경 30분 후 빵이나 보릿가루로 아침 공양을 하고 다시 명상한 후 점심을 정성껏 차려먹는다. 낮에는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앞서 말했듯, 눈과 얼음이 녹는 여름에는 라다크 지역에도 들려 아픈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

“수행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남을 위하고 사람을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편안한 대로 하는 거예요. 폼 잡지 말고 편하게 사는 게 바로 행복입니다.”

지난봄 귀국해 한 거사의 강권 아닌 강권으로 건강검진을 받은 그는 “의사가 영양실조래요”라며 웃었다.

“이젠 라다크 방문 횟수를 줄일 생각입니다. 제가 직접 보시하러 가지 않고 그곳 사람들을 불러 필요한 의약품 등을 가져가게 하면 되니까요.”

스님은 이번 대상을 받으러 한국에 오기 전 한 독지가가 선물한 자동차를 라다크의 한 마을에 전달하고 왔다.

“가난도 자기가 선택한 가난이라면 가난이 아니다”는 스님은 “남을 위한 봉사와 자기희생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를 곱씹으며 이날의 만남은 끝이 났다.

출처: http://cafe.daum.net/mujuseo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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