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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혜(戒·定·慧)를 닦아라

지복에 이르는 길..../지혜, 방편

by O_Sel 2008. 5. 28.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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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혜(戒·定·慧)를 닦아라 

 
초기경전에 설해져 있는 불교의 수행 덕목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 모든 수행 덕목은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삼학(三學)에 귀속시킬 수 있다.

계학(戒學)이란 수행 방법 중에도 특히 정의적 습관적인 악덕을 교정하여 선한 덕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계(戒)라는 말에는 습성 습관의 의미가 있다. 즉 선이든 악이든, 습관적 행위를 모두 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쁜 측면은 파계(破戒, sila-vipatti, 毁戒)라든가 악계(惡戒, dussila)라고 부르고, 단지 계라고만 할 때에는 선한 습관적 행위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세속적 의미에서의 계란 도덕적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의 실라(sila)는 영어의 moral이라든가 ethic에 해당하는 말이다.

불교적으로 계라는 말을 정의하면, '심신(心身)의 조절(調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심신을 조절해야 하는가? 정(定)이나 혜(慧)를 얻기 위해서 이다. 정(定)이라는 것은 등지(等持) 또는 삼매(三昧)라고 번역된다. 즉 정신을 통일 집중시켜, 산란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전심하여 삼매의 상태에 두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정(定)이 필요한가? 통일 집중된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을 통일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심신이 이에 적합하도록 조절되어야 한다. 조절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정신 통일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수면 부족이라든가, 과로라든가, 과식 폭음이라든가, 질병이나 부상 또는 정신 쇠약 때문에 신체의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어떤 부도덕이나 불의를 행해서 마음의 부담이나 불안 등이 생겨 정신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을 통일시키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미리 신체의 컨디션이 건전하고 정신상태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신체나 정신을 조정하는 것을 계(戒)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라는 것은 반드시 윤리 도덕적인 선(善)만이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 신체의 건강 건전도 포함하고 있다. 선한 습관이 붙은 건전한 육체와 정신의 상태가 계이다. 계가 바르게 되면 비로소 정이 용이하고 또 완전하게 얻어지는 것이다.

정(定)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것에 의해 올바른 혜(慧)를 얻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불타 당시 외도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정을 가지고 수행의 최후 목적으로 삼아, 정을 얻으면 그것으로 열반의 이상경에 도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주정주의자(主定主義者)라고 한다. 이것은 불타가 수행시에 사사(師事)하였던 두 선인이라든가, 육십이견(六十二見) 가운데 있는 초선 내지 제4선의 선정 자체를 열반이라고 주장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선정에만 의존하는 경우, 정신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일체의 불안이나 고뇌가 없게 될지 몰라도, 일단 선정의 통일 상태에서 나오면 역시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불안 고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주정주의자에 의하면 불안 고뇌가 전혀 없는 절대 확실한 이상은, 육체가 소멸되는 사후가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후에 이상경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상을 달성하여, 이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안된다. 이 세상에서 자신도 주위 사람들도 모두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주정주의에 의해서는 이 목적이 달성되어질 수 없다.

불타가 두 선인의 뛰어난 선정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곁을 떠난 것도, 그와 같은 주정주의의 결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불타가 깨달은 이상의 상태는 선정이라는 특별한 정신 통일을 얻은 동안뿐 아니라, 보통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절대로 불안 고뇌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의 상태는, 단지 선정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이해하여, 일상 생활 그 자체가 이 세계관 인생관에 부합하게 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그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 즉 연기(緣起)나 사제(四諦)의 이법을 아는 마음의 작용을 불교에서는 혜(慧)라고 부른다.

혜(慧)라는 것은 음역하여 반야라고도 하고, 반야의 지혜라고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 속에 있는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지식이 실천과 결부되어 몸으로 체험 되는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선정이 필요하다.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은 것은 선정의 상태에서였다.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이 통일되어 냉철 그 자체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얻고자 하는 지혜가 고도로 순수한 것일수록, 그 지혜를 얻기 위한 선정도 정신이 극도로 순화되고 통일된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와 같은 선정은, 올바르고 뛰어난 반야의 지혜를 획득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지혜 경험을 최고도로 활용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이미 뛰어난 지혜 경험을 얻었다고 해도, 정신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냉철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지혜 경험을 충분히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입학 시험을 치룰 학생이 이미 충분히 준비를 하여 모든 과목에 대해서 우수한 수준의 학습을 마친 경우에도, 시험장에 임해 마음이 동요되어 정신 통일 안된다면, 이미 학습하여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답안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학습 준비가 된 후에, 그것을 완전히 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좋게 하여 통일된 마음과 냉정한 태도로 시험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때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조정하는 것이 계(戒)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바르게 보존함으로써 정신 통일의 선정을 얻을 수 있고, 바른 선정을 얻음으로써 충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또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적인 일에 있어서도 계 정 혜 삼학을 구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사무나 사업을 순서대로 척척 처리해 나아가는 사람은 이와 같은 세간적인 의미의 삼학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삼학은 일반 사회 생활에서 필요할 뿐 아니라, 불도 수행에 있어서도 근간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삼학은 윤리적 규범인 계(戒 sila), 정신적 수행인 정(定 samadhi), 지혜의 연마인 혜(慧 panna)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의 관계는 무엇인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의하면, "이러 이러한 계 · 정 · 혜가 있다. 계가 실천되었을 때, 정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이 실천되었을 때, 혜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가 실천되면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 유루(有漏) · 견루(見漏) · 무명루(無明漏)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라고 했다.

이처럼 이 세 가지는 원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가운데 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규범은 보다 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고,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성 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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