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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자비의 이중주, 티베트 불교 (by 주민황)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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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자비의 이중주, 티베트 불교



글쓴이 : 주 민황
출 처 : 계간 『불교평론』겨울호


- 차례 -

1. 티베트 불교에 대한 오해:티베트 불교는 라마교 ?
2. 티베트 불교의 전래
3. 티베트 불교의 교리적 특징
4.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과 그 특징
5. 맺는 말



1. 티베트 불교에 대한 오해:티베트 불교는 라마교?


티베트 불교는 어떤 불교인가? 요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이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에서 변질된 불교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는 시대에 따라서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등의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그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라도 불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므로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승불교의 지지자들은 대승불교의 뿌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밀교 역시 그렇다. 인도를 벗어난 불교는 여러 나라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발달했다.

그래서 중국에 들어가서 그 문화 속에서 발전한 불교를 중국불교라고 하고, 티베트에 들어가서 발전한 불교를 티베트 불교, 한국에 들어와서 발전한 불교를 한국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불교문화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해서 불교의 근본교리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것은 아니다. 불교문화는 단지 부가적인 것에 불과하다. 티베트 불교라고 불리는 불교는 티베트 사회에 적응해서 발전한 불교를 가리키지만, 그 뿌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고 있으므로, 그것을 두고 정통 불교와는 다른 변형된 불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르면서 마치 티베트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라마라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불교로서 정통 불교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결코 라마교가 아니다. 라마교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티베트에는 라마교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마(blama)’는 티베트 어로는 ‘최상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산스크리트의 ‘구루(guru)’를 뜻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티베트 인들은 불교에 대한 깊은 지식과 수행을 갖추고, 제자들에게 수행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라마’라는 명칭을 붙여준다. 티베트 인들은 사귀의를 한다. 라마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마에게 귀의하는 것은 라마라는 개인을 삼보보다 높은 위치에 두기 때문이 아니다. 라마의 말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고, 라마의 생각은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하며, 라마의 행동은 승가가 행해야 할 행동을 대표한다. 따라서 라마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우리 눈앞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눈앞에서 육체를 가지고 직접 부처님의 가르침과 마음을 전해주는 스승인 라마를 통해서 부처님을 보며, 중생들 속에 잠재된 불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티베트 불교를 마치 부처님 대신에 라마를 신봉하는 변질된 불교처럼 보이게 하려고 라마교라 부르는 것은 티베트 불교를 비하시키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2. 티베트 불교의 전래


1) 제1차 불교 전래

티베트에 불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에 들어와서이다. 7세기 전반의 송첸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43∼649)이 작은 부족들을 통합해서 통일 티베트를 처음 세운 후, 중국과의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 당나라의 문성(文成) 공주가 시집올 때 결혼 예물로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왔다.

그 불상을 모실 법당을 티베트의 수도인 라사에 세웠지만, 불교교리를 민중에 널리 전파할 발판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8세기 후반에 티송데첸 왕(Khri srong lde brtsan, 742∼797)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번역청에서 산스크리트 경전과 중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티베트 어로 번역하면서 티베트는 풍부한 불교경전을 보유하게 되었다. 불교가 처음 전해진 이 시기에는 불교의 기초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전해진 듯이 보인다.

부처님과 보살이나 독각승(獨覺乘), 성문승(聲門乘)을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지 않으면 지옥에 태어나거나 나쁜 곳에 태어난다고 하며, 자비와 지혜의 두 가지 공덕을 함께 쌓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10계를 지켜 선행을 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업(業)에 관한 이론과 고집멸도의 사성제, 인과법,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의 가르침 등에 중점을 두었다.

불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티베트로 전해졌기 때문에, 티베트에 전해진 불교에는 상이한 교리와 불교 외적인 개념들도 섞여 있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민중들은 어려운 불교 교리보다는 여러 형태의 기도와 신비체험을 하는 수행을 더 좋아했다. 특히 티베트 인들은 거대한 자연의 힘을 두려워했고, 자연환경의 어디에나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불교가 티베트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런 성향의 티베트 인들에게 어울리는 요소를 수용해야 했다. 그래서 티송데첸 왕이 인도에서 초청한 대학자인 ‘샨타락쉬타(Shantaraksiita, 寂護, 725∼788경)’나 ‘카말라쉴라(Kamalashila, 蓮華戒, 700∼750경)’ 등의 논사들의 가르침보다는 자연신(自然神)들을 제압해서 불교의 수호신으로 만든 당대 인도의 최고의 밀교 수행자인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華生)’의 밀교적 신통력이 민중에게 더 호응을 받았다.

티베트의 자연환경과 티베트 인들의 성향에 밀교가 적합했던 것이다. 티베트가 중국불교 수행법을 따를 것인가, 인도불교 수행법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할 시기가 왔다. 티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삼예(bsam yas) 사원(755년경 설립)에 양쪽 대표를 초청해서 대토론(792∼794)을 벌인 끝에 인도불교를 선택했다. 그 선택 뒤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중국 사이에는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국은 티베트를 문화적으로 침식시킬 방편으로 중국불교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티베트 왕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도와 가까이하려는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 이후로 티베트의 불경 번역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경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9세기 전반의 랄파첸 왕(Ral pa can : 본명은 티죽데첸, Khri gtsug lde brtsan, 재위 815∼838)은 불경 번역 사업에 주력하고, 사원과 승려들에게 지나칠 만큼 재정적 후원을 많이 하고, 노역과 병역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기반과 군사력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래서 왕의 형인 랑다르마(glang dar ma : 본명은 티두둠첸, Khri bdu dum brtsan, 809∼842)는 티베트 토속교인 ‘본’(Bon)교의 지지자들과 음모를 꾸며 랄파첸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불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랑다르마 왕은 모든 사원들을 허물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그 후 842년에 한 승려가 랑다르마 왕을 살해한 후에 티베트의 정통 왕조는 사라지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불교를 후원하던 왕가가 사라지고, 불교 탄압으로 인해 사원과 승려들이 사라지자 티베트에는 그 후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불교를 가르치고 수행할 장소나 기회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밀교 경전을 구해서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수행을 빙자한 도덕적 타락이 횡행하게 되었다. 불교 수행을 빙자한 타락한 행동이 유행하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불교를 정화하고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되었다.

10세기 말에 서부 티베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불교부흥운동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불교를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의 서부 티베트1)의 왕은 당시의 비크라마쉴라(Vikramashila) 대학의 학장이던 아티샤 스님(Atisha, 본명은 Dipam kara-srijnana, 982∼1054)을 티베트로 초청해서 불교 재흥운동을 벌이고, 도덕적인 불교 수행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아티샤 스님은 당대 최고의 학승일 뿐 아니라 최고의 밀교 수행자였지만, 티베트 인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서 주로 마음 닦는 법에 관한 가르침을 폈다. 후대에 어떤 티베트 수행자들은 아티샤 스님이 그 당시에 밀교를 티베트에 적극적으로 퍼뜨렸다면 많은 티베트 인들이 빨리 성불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밀교는 강력한 수행방법을 사용해서 빨리 성불함으로써 많은 중생들을 도울 수 있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아티샤 스님의 직계 제자들의 계열을 ‘카담파(bka’-gdams-pa)’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주된 수행으로 삼았다. 아티샤 스님에게서 시작된 마음 닦는 수행은 지금도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수행으로 실행되고 있다.


2) 제2차 불교 전래

10세기 말 이후에 인도에서 검증되고 인정받은 산스크리트 밀교 경전이 티베트에 전래되어 티베트 어로 새로 번역하거나, 이미 티베트 어로 번역되었던 밀교 경전을 새로 편집했다. 새 밀교 경전을 ‘새 밀교(규사르마, rgyud-gsarma)’라고 부르고, 그 이전에 번역되었던 것들을 ‘옛 밀교(규닝마, rgyud- rnying-ma)’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닝마파의 수행을 비정통적인 밀교라고 간주하는 풍조가 생겼다. 11세기가 되면서 티베트의 여러 곳에 큰 사원이 세워지고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아티샤 스님의 직계 제자들을 통해서 이어진 계열을 ‘카담파’라고 부르고,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불교 탄압 이전에 티베트에 들어왔던 불교를 유지하는 계열을 ‘닝마파(rnying-ma-pa)’라고 불렀다. 그 외에 ‘카규파(bka’-brgyud-pa)’와 ‘사캬파(Sakyapa)’라는 종파가 생겼는데, 그 종파들은 닝마파의 성격을 반쯤 유지하면서 인도로부터 새로 전해진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 가르침을 펴고 수행했다. 현재 가장 교세가 강한 겔룩파(dge-lugs-pa)는 카담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14세기 후반에 새로 생긴 종파이다.

제2차 불교 전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인도에서 오랫동안 불교공부를 하고 온 티베트 인 번역가들과 수행자들이었다. 이때부터 ‘라마’는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라마는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수행이 높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경전과 불교 수행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불교경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한 결과로 타락한 행동이 유행하던 사태를 이미 경험했던 티베트 사회는 제2차 불교 전래 이후에는 스승의 철저한 지도 아래 수행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히 티베트 사회에서 라마의 위치는 점점 더 확고해졌다. 특히 밀교를 수행할 때는 라마에게서 직접 밀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수행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3) 티베트 불교와 본교의 습합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본교가 티베트의 토속 종교였다. 그러나 8세기의 티송데첸 왕은 왕권과 맞먹는 세력을 확보한 귀족들과 결탁한 본교 사제들을 견제하는 한편, 국민의 도덕성을 개선시키고, 높은 정신문화를 수용하려는 뜻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본교의 입장에서는 티베트에 새로 들어온 종교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교가 티베트에 처음 들어오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불교도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때까지 경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본교도들은 불교경전을 모방해서 경장과 논장을 만들어 퍼뜨리고는 오히려 불교가 본교의 경전을 표절했다고 선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은 본교의 문헌들을 모두 압수해서 태우라고 명령했다. 본교도들은 미래에 적당한 때가 이르면 세상에 발견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경전을 비밀스런 장소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10세기 초부터 본교의 비밀경전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발견된 본교의 경전들을 모은 것을 14세기에 와서 편찬했다. 방대한 본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됐기 때문에, 본교의 원래 모습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본교의 경전들은 불교가 티베트에 들어오기 전에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졌던 본래의 본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8세기에 불교가 티베트의 국교로 정해진 이후에 본교가 티베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불교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되어 성문화된 가르침이다. 어쨌든 8세기에 불교와 본교가 티베트에서 경쟁 관계에 있을 때, 티베트에 새로 들어온 불교는 토속교인 본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본교는 막강한 왕권을 뒤에 업고 있는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도 토속적인 민속종교인 본교가 지닌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티베트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다. 본교에서 숭배하던 여러 자연신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했고, 본교 의식에서 쓰던 도구를 불교의식 도구로 받아들여서 악귀를 쫓는 데 사용했다. 또한 티베트 인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서 산 위에 가로로 길게 매다는 깃발(다르조, dar lcog)들도 본교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달리는 말의 모습과 기도문을 써넣은 오색의 천들을 긴 끈에 여러 개 이어 달아서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산 위에 매달고 행운을 비는 것은 티베트 사회에선 흔한 광경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행운의 말(룽타, rlung rta)이 달려가서 세상에 수명장수와 부귀와 건강을 가져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풍습이 불교 속에 흡수되면서 이생에서의 이익뿐 아니라, 다음 생의 이익이나 정신적 성취를 얻으려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이밖에도 본교에서 산 짐승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양을 올리던 의례를 변화시켜, 보릿가루와 버터로 반죽을 빚어 만든 형상으로 공양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하는 관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거울이나 염주나 주사위를 사용해서 미래를 점치는 관습도 불교문화 속에 흡수되었다.

본교에서 받아들인 그런 요소들 때문에 티베트 불교를 무속 신앙적이고 기복적인 변질된 불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통 티베트 불교는 결코 주술적이거나 기복적인 불교가 아니라 지혜를 강조하는 대단히 지성적인 불교이다.



3. 티베트 불교의 교리적 특징


티베트 불교의 각 종파의 가르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특정한 밀교 수행을 선호한다든지, 밀교 수행에서 얻는 체험을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서 각 종파가 강조하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중국에서는 어떤 경전에 의거해서 수행하는가에 따라서 종파가 생겼지만, 티베트의 종파들이 선호하는 경전은 거의 동일하다. 각 종파의 강원에서는 다르마키르티(Dharmakrti, 法稱)의 논리학과 《반야경》, 중관철학(Madhyamaka), 나가르주나와 아상가(Asanga, 無着), 하리바드라(Haribhadra) 등의 저서들과 《구사론(Abhidharmakosha)》과 율장 등을 가르쳤다.

겔룩파와 사캬파는 강원 교육에 중점을 두었지만, 닝마파와 카규파는 족첸(rdzogs-chen)과 마하무드라(mahamudra) 등과 같은 밀교 수행에 중점을 두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종파에서 10여 년 간의 강원 교육을 마친 후 밀교 수행을 시작하게 한다.

티베트에 중관철학이 소개된 것은 11세기에 파샵니마닥(Pashab-nyima-grags, 1055∼1158)과 자야난다(Jayananda)가 찬드라키르티(Candrakrti, 月稱)의 논서들을 티베트 어로 번역한 후였다. 그때부터 귀류논증(歸謬論證, Prasangika) 중관파는 티베트 불교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사캬파와 겔룩파의 학자들은 찬드라키르티의 논서를 중요시했다.

특히 겔룩파의 시조인 쫑카파(Tshong-kha-pa)는 나가르주나와 붓다팔리타(Buddhapalita, 佛護)와 찬드라키르티로 이어지는 귀류논증 중관파의 입장을 강조했기 때문에, 겔룩파에서는 귀류논증 중관파의 학설에 의지했다. 귀류논증파(Prasangika)와 독립논증파(Svatantrika)라는 구분은 11세기 이후에 티베트에서 중관학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논쟁의 상대자에게 공성(空性)을 어떤 방법으로 이해시키는가에 따라서 중관학파를 구분한 것이었다. 그 구분은 찬드라키르티가 《명구론(明句論, Prasannapada》에서 사용한 용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귀류논증파는 자신들의 전제를 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논증이 오류임을 증명한다. 반면에 독립논증파는 자신들의 전제를 세우고 그것이 옳음을 증명했다. 또한 귀류논증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전혀 없다는 철저한 공성을 지지했다. 반면에 독립논증파는 모든 것의 공성을 인정하지만, 연기하는 객체들이 독특한 존재양식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귀류논증파는 그런 존재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철저히 부정했다. 쫑카파 이후의 티베트 불교는 귀류논증파의 철저한 공성론을 지지해왔다. 왜냐하면 공성을 이해하면 윤회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제5대 달라이 라마(아왕 로상 갸초, 1617∼1682)가 정치권과 종교권에서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후, 겔룩파의 세력이 티베트에서 가장 강해지고 번성해진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겔룩파에서 강조하는 귀류논증 중관철학은 티베트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사상이 되었다.

밀교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관철학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티베트 불교의 본류는 대단히 지성적인 것이다. 지엽적인 것을 확대해서 티베트 불교를 주술적·미신적인 종교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과 그 특징


티베트에 처음 소개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힌두 밀교 수행이 결합된 상태였다.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불교 경전에서 가르치는 수행이다. 이 수행의 핵심은 도덕과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밀교 수행이다. 이 수행은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힌두 요가와 힌두 밀교의 방법을 결합시킨 것이다.

티베트 불교는 밀교(탄트라)수행을 강력한 방편으로 사용한다. 총카파 스님은 도덕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자비심과 지혜의 공덕을 쌓은 후에는 밀교 수행을 하라고 충고한다. 티베트 불교도들이 누구나 밀교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밀교 수행은 현교(顯敎) 수행으로 바탕을 확고히 다진 후 다음 단계로 밟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수행이다.

밀교 수행은 결과가 빨리 오고 강력한 만큼 위험도 크다. 중관 철학을 확고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밀교 수행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타락하는 경우도 있다.


1) 람림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의 특징은 ‘람림(Lamri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람림은 밀교 수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다. ‘람림’의 ‘람’은 길(道)이고, ‘림’은 단계라는 뜻이다. 요컨대 람림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단계적 수행법’이다. 람림에서도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

스승은 제자의 의식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판단해서 그에 알맞은 수행방법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기를 정한다. 두통약을 먹어야 할 환자에게 소화제를 주거나, 소화제를 먹어야 할 환자에게 항암제를 준다면, 약이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수행이 약이라면 수행자는 환자이다. 자격 있는 스승을 만나서 안내를 받는다면, 쓸데없이 길을 헤매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고 수행하며, 스승은 환자를 다루는 의사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제자를 보살피게 된다. 그래서 티베트 인들은 올바른 스승을 만나 철저히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깨달음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에서도 문사수(聞思修)는 모든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강조되는 것이다. 보리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나면, “모든 중생이 수없이 많은 전생 중의 어느 생에선가 한번쯤은 내 어머니였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내게 사랑을 베풀고 보살펴 주었던 분들이 지금도 윤회 속을 떠돌며 고통을 당하는 중생으로 살고 있으니 중생들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도록 안내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보리심”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보리심에 대해서 깊이 명상해서 내 마음 속에 보리심을 일으키고 발전시킨다.

그런 식으로 초보 단계에서부터 한 가지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생각하고 명상하는 단계를 거친 다음에 마음이 확고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가르침을 스승에게서 받는다. 따라서 육도윤회에 대해서 듣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단계가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티베트 불교의 꽃이라고 할 ‘람림’ 수행은 아티샤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티베트에 온 아티샤 스님에게 서부 티베트 왕족인 장춥외(byang chub o’d) 스님은 수행법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쓰여진 것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bodhipathapradipa·byangchub lamgyi sgronma)》이었다.

그러나 《보리도등론》에는 수행의 핵심만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그 후로 주석서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주석서 중 가장 방대하고 대표적인 것이 1402년에 쫑카파 스님(1357∼1419)이 지은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byangchub lamgyi rimpa)》이다. 쫑카파 스님이 겔룩파의 창시자인 만큼 지금까지도 겔룩파에서는 《보리도차제론》을 가장 중요한 수행의 지침서로 삼고 있다. 다른 종파들도 아티샤의 ‘람림’ 수행법을 받아들여 수행지침서를 만들어서 제자들을 지도해 왔다. 람림의 기본구조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초급과 중급과 고급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초급은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수행하는 사람이고, 중급은 자신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고, 고급은 모든 중생들을 윤회에서 해탈시키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낮은 단계의 수행은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기반이 되는 것이므로, 소승의 수행을 확고하게 한 후에 대승과 밀승(密乘)의 단계로 올라간다.

모든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붓다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심이라는 두 날개를 갖춰야 한다. 계율을 잘 지켜야 보살의 서원을 이룰 수 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상을 해야 한다.” 등이 람림의 기본적인 가르침들이다.

람림 수행에서 가르치는 주제들은 ① 스승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것, ② 불법(佛法)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소중하다는 것, ③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며, 세상의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는 것, ④ 육도윤회 가운데 삼악도에 태어나는 것이 위험한 이유, ⑤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삼보에 귀의하는 것, ⑥ 업(業)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⑦ 모든 중생에 대해서 평등심을 기르고 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⑧ 이기심이 가져오는 피해를 생각하며 남을 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훈련하는 것, ⑨ 남들의 고통을 내가 떠맡고 내 행복을 남들에게 나눠준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것, ⑩ 내가 모든 중생들을 도와서 해탈시키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⑪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 ⑫ 모든 것의 공성을 통찰하는 훈련을 하는 것 등이다. 초급 수행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업(業, karma)에 관한 것이다.

‘카르마’는 행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이지만, 의지가 포함된 행동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로 바뀌었다. ‘업’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미움 등의 번뇌에 오염된 중생들이 의지를 갖고 한 행동들이다. 행동은 몸과 생각과 말로써 나타날 수 있다. 행동에 담긴 의도는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수행자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업에는 우리 자신의 의도가 섞여 있기 때문에 업을 선택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저지른 업의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업과 업보는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숙명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업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업보를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업이 숙명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업과 업보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의도가 담긴 행동을 하고 나면, 그 의도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력으로 남게 된다. 나중에 그 잠재력이 발휘될 기회가 생기면 업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 속에 감춰진 의도는 잠재력으로 의식 속에 남기 쉽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계율은 부도덕한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막아주는 방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좋은 업을 쌓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자의 계율보다는 비구의 구족계가 부도덕을 방지하는 더 철저한 방벽이다.

이미 저지른 업이 심어 놓은 잠재력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해탈과 성불뿐이다.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명성과 획득을 원하고, 상실과 두려움을 싫어하고, 이기심을 기르다가 결국 패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장기적인 이익을 구하기 때문에 업에 대해서 배우고 더 장기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영원한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구한다.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 가운데 신(神)들은 즐거움에 빠져 있고, 반신(半神, asura)들은 신들에 대한 질투로 가득 차서 수행할 여유가 없다. 짐승들은 수행할 정신적 능력이 없고, 생존만을 생각하며 산다. 귀신들은 고통과 질투에 짓눌려서 자신들이 가진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깨끗한 물을 보면 고름과 피라고 생각하고, 엄청난 식욕을 채우려고 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지옥 중생들은 미움과 탐욕으로 저지른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수행할 여유가 없다.

인간의 세계도 탐욕과 분노로 가득 차 있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일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법을 만나서 수행할 기회를 만든다. 그런 경우를 가리켜 ‘귀중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수행할 조건이 갖춰진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업의 인과법을 생각하며 인간의 수명을 귀하게 여기며 수행에 힘쓴다. 이상의 것들이 초급 수행에서 생각하는 주제들이다. 초급의 수행에 충분히 익숙해진 후에는 중급의 수행으로 들어간다. 중급 수행에서는 개인의 해탈을 구한다. 해탈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명상한다.

육도윤회에서 헤매는 동안은 업(業)을 피할 길이 없다. 신들의 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다른 세계로 태어나야 한다. 신의 세계에서는 즐거움에 취해 선행을 닦지 않기 때문에 공덕을 쌓지 못해서 다른 낮은 세계로 태어나게 된다. 심지어는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중급 단계에서는 육도의 윤회 속에 있는 동안은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명상한다.

윤회 속에는 세 종류의 고통이 있다. ① 고통스러운 고통, ② 변하는 고통, ③ 보편적인 고통 등이다. 고통스러운 고통은 죽음과 병과 전쟁 등과 같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고통을 말한다. ‘변하는 고통’은 변화에서 생기는 고통을 말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잠시 동안은 행복하지만 곧 다른 욕구가 생기면 이미 얻었던 것에 대해서 싫증을 내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일시적인 행복이 나중에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을 ‘변하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보편적인 고통’은 윤회 속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고통을 말한다.

모든 것이 무상한데도 영원을 찾아 헤매며, 변치 않는 ‘나’란 것은 없는데도 ‘나’를 찾으려 하며, 영원한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데도 ‘내 것’을 찾아다니는 중생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보편적인 고통’이라고 부른다. 그런 종류의 고통이 윤회 속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깨달은 수행자들이 “모든 것이 고통이다.”라고 말할 때는 세번째의 ‘보편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윤회 속에 있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의 고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윤회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되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해탈을 구하는 중급의 수행자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음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 초급과 중급 다음에는 상급의 단계가 있다.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에 있다. 지혜에 대해서만 명상한다면 대승불교도들도 아라한의 길로 빠지게 된다. 보리심을 수반한 지혜만이 전지(全知)와 해탈을 막는 장애를 제거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상급의 수행은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해탈을 구한다.

과거 언젠가의 전생에 나와 친밀했던 중생들이 지금은 지옥에 떨어지거나,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현생의 나의 적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그 중생들을 해탈시키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붓다의 지혜만이 중생들의 기질에 맞게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붓다의 경지에 올라 중생들을 돕고 싶다는 서원을 세운다. 그런 마음이 보리심이다.

‘붓다는 중생들을 해탈시키고, 보리심은 붓다를 만든다’고 한다. 중생들을 해탈하도록 돕겠다는 보리심 때문에 성불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성불의 원인은 보리심인 것이다. 보살은 중생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수행해서 지혜와 공덕을 쌓은 결과로 붓다의 힘과 특성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보리심이 없이 밀교 수행을 하면 기껏해야 신통력을 가진 악마로 태어난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보리심이 동기가 되어 수행을 하는지를 점검하라고 강조한다. 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 등의 육바라밀은 상급의 수행에서 완성된다.


2) 밀교 수행

이상의 세 등급의 수행을 거친 후에 밀교 수행을 하게 된다. 밀교를 수행할 때는 현교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밀교는 현교 위에 부가되는 것이지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밀교 수행자는 단지 밀교 경전을 독송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밀교 명상을 하기 위해서 경론(經論)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

밀교 수행은 욕망과 질투와 혐오 등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들을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건전하고 유익한 힘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내 앞으로 달려드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야생마의 앞을 가로막고 멈추라고 소리치다가는 말에게 채일지도 모른다. 밀교 수행은 옆으로 비껴서 있다가 야생마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에 등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을 달래며 마구간으로 몰고 갈 수 있게 된다.

밀교 수행에는 자기제어와 수용의 기술이 필요하다. 밀교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독특한 예비수행들이 있다. ① 오체투지, ② 금강살타(Vajrasattva) 명상, ③ 만달라(mandala) 공양, ④ 구루요가(guruyoga) 등을 각각 10만 번씩 수행한 후에 본격적인 밀교 수행에 들어간다. 오체투지를 할 때는 내 앞의 허공에 부처님이 연화좌에 앉아 계시고, 부처님의 좌우에 보살님들과 역대 고승들이 둘러싸고 있고, 불경(佛經)이 부처님 뒤쪽에 쌓여 있고, 부처님의 앞쪽으로는 불교의 수호신들이 모여 있다고 상상한다.

내 좌우에는 각각 어머니와 여자 친척들, 아버지와 남자 친척들이 서 있고, 내 앞에는 원수와 적들이 서 있고, 내 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있다고 상상한다. 원수를 앞에 세우고 친구를 뒤에 세우는 것은 평등심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 주위에 육도윤회 속의 모든 중생들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함께 서 있다고 상상하면서, 내가 절을 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이 절을 한다고 상상하며 오체투지를 한다.

땅에 엎드릴 때는 과거의 잘못을 모두 참회하고, 일어설 때는 부처님의 말씀과 행동과 생각이 나를 가득 채운다고 상상한다. 금강살타 명상은 100개의 음절로 된 진언이라고 해서 백자진언(百字眞言)이라고 불리는 진언을 10만 번 암송한다. 이 수행을 할 때는 나를 비우고 금강살타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금강살타가 된 상태에서 진언을 암송함으로써 과거의 악업을 정화한다.

만달라 수행을 할 때는 불보살님께 세상의 모든 귀중한 것을 바친다고 상상하면서 쌀과 보석 등을 만달라 판 위에 올려 쌓았다가 다시 쏟으며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한 번으로 쳐서 10만 번을 되풀이한다. 이 수행을 통해서 보시하는 마음을 기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다짐하는 마음을 기른다. 구루요가는 나를 비우고 스승과 내가 하나가 된다고 상상하며 스승에게 귀의하는 기도문을 외운다.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에게 헌신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기른다. 이 수행을 통해서 수행자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악업을 정화하고, 깨달음에 대한 확고한 열망을 기르며, 스승에 대한 신심과 헌신을 기르고 나면 밀교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때 스승에 대한 믿음은 내 안의 불성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낸다. 스승과 하나가 되는 것은 곧 나의 불성과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밀교 수행에는 ‘관상(觀想) 단계(生起次第)’와 ‘완성 단계(圓滿次第)’의 두 단계가 있다.

관상 단계는 상상력을 이용해서 신과 내가 합일되는 것을 관상하는 초기 단계이다. 밀교의 신을 관상하고 내가 그 신의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상상한 다음에 내가 만달라 속의 신이 되었다고 관상하면서 그 신의 지혜로 중생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상상한다. 관상이 끝난 후에는 신의 모습조차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성을 자각한다. 관상 단계의 명상에 익숙해지면 완성 단계로 들어간다. 완성 단계는 우리의 육체 안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이용하는 고도의 명상법이다.

이 기운은 정신적 신경조직을 통해서 흐른다. 그 기운이 중맥(中脈) 속으로 들어와 흐르면 수행자는 안정감을 느끼고 명석한 마음을 갖게 된다. 좌우맥이 중맥을 조이고 있는 몇 개의 신경조직망이 있는데 그 지점들을 ‘차크라’라고 부른다. 차크라는 사람의 사념체와 육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척추의 바로 앞쪽에는 정수리로부터 단전에 이르기까지 가느다란 중맥이 있고, 중맥의 좌우로 더 가느다란 좌우맥이 있다고 상상한다. 그 맥을 사념체 속에서 상상한다.

분별망상을 할 때는 기운이 좌우의 맥으로 흐르지만, 마음이 한 곳에 모이면 기운은 좌우맥으로부터 중맥으로 흘러들어간다. 좌우맥과 중맥은 단전 부분에서 서로 만나는데, 그곳에서 기운이 중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좌우맥이 중맥의 옆에 나란히 흐르는데, 몇 군데서 중맥을 둘러싸며 조여서 매듭을 짓는다. 그 매듭 부분이 차크라이다. 기운이 중맥으로 흘러들어가서 차크라의 조임을 차례로 느슨하게 만든다.

중맥으로 기운이 흘러들어가게 하고, 차크라의 매듭이 느슨해지면, 분별심이 생기기 이전의 본래의 지혜의 빛이 나타난다. 모든 것의 공성을 통찰하고 무한한 자비심으로 가득 찬 지혜의 빛으로 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별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기운이 중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좌우맥으로만 흐른다. 티베트 밀교 수행에서 중요한 툼모(tummo)도 단전에서 불을 일으켜 중맥 안으로 기운을 흘러들어가게 하는 수행이다.

그 불은 단지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불이 아니라 단전에서 일으키는 지혜의 불로서 중맥 속으로 지혜의 기운을 흐르게 하는 수행이다. 사람의 몸에는 평소에 사용하는 육체적 몸(化身)과 아스트랄계의 몸(受用身)과 그보다 더 미묘한 차원의 몸(法身)이 있다. 완성 단계는 수행자의 몸과 말과 생각을 이 세상의 육체적 차원에서 벗어나게 해서 아스트랄계에서 발전한 사념체 속에 정신적 기운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법신의 의식인 밝은 빛과 같은 미묘한 의식을 발전시키고, 사념체를 밝은 빛의 의식(法身)과 결합시켜 깨달음을 얻는다. 티베트 불교 수행에서 선불교(禪佛敎)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 닝마파의 족첸(rdzogs-chen) 수행의 결과는 밀교 수행과 동일하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족첸은 실재의 본성을 직접 자각하라고 강조한다. 사념체를 상상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법신(法身)을 직접 자각하라고 한다. 이 법신은 인간의 말이나 감정 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다.

족첸 수행은 선 수행과 비슷하며, 모든 경험을 수행과 관련시킨다. 족첸은 실재의 심오한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족첸 명상 중 어떤 것들은 밀교의 관상이나 차크라 명상과 비슷하다. 족첸 수행을 하기 전에 갖춰야 할 예비수행도 밀교 수행과 같다. 밀교 수행 전체를 통해서 공성에 관한 명상은 필수적이다. 현상 세계의 나는 한정된 기간 동안만 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죽으면 소멸한다. 그러나 정신적 육체인 수용신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기 때문에 신체적 몸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육체적 자아의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육체에 근거한 나를 일시적인 옷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의 자각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결국 티베트 밀교의 수행법들은 모두 중생에게 내재된 본래적 지혜의 빛, 즉 불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들이다.



5. 맺는 말


티베트의 법당에서 행해지는 불교의식들 속에 토속종교인 본교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고 해서, 티베트 불교의 본질이 인도불교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티베트 불교를 인도불교와 본교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변질된 불교라고 말하는 사람은 티베트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각 나라로 수입된 불교는 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불교문화를 형성했지만, 불교의 가르침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도의 정통적인 불교 학자들의 가르침들과 인도에서 발전한 밀교를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했다.

본교의 요소가 남아 있는 티베트 불교의 의례들은 그 나라의 문화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야 할 뿐이며, 그것을 티베트 불교의 본질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티베트 불교의 현저한 특징은 지혜와 자비심, 보리심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며, 마음 닦는 법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마음 닦는 수행의 단계들을 제시함으로써 수행자 자신이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안내한다는 점이 티베트 불교의 장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티베트 불교 수행자들만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수용해야 할 가르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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