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규/중앙승가대학교 강사
불교에서는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 둘로 구분한다. 세속제는 세속의 진리이고, 승의제는 궁극적인 진리이다. 세속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진리이고, 승의제는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진리이다. 따라서 세속제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고, 승의제는 진리 그 자체이다. 이제를 통해 진리를 구분하는 것은 중관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부파가 각기 다른 이제설을 정의하고 있고, 이 이제설을 근거로 실천과 결과를 증득하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중관귀류논증파의 관점에서 이제설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이제설의 성립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불교의 진리관을 “세간의 세속제와 승의제다.”라고 하여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제로 불교의 진리관을 구분하고 있다. 세속제는 ‘세간의’라고 한 것처럼 일체 세간의 경계이고, 승의제는 성자의 등지等至인 평등한 지혜의 경계이다. 세간의 경계든, 성자의 등지 중의 경계든 뒤바뀐 것이 없기 때문에 진리[諦]라고 한다. 진리를 승의제와 세속제의 이제설로 구분하는 토대는 『집학론』에서 “인식되는 것[所知]은 이 세속제와 승의제에 포함된다.”고 하기 때문에 인식대상이 이제를 구분하는 토대가 된다.
인식되는 것을 통해 진리를 승의제와 세속제로 구분한다면 승의제와 세속제는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두 가지 사물이 존재할 때 둘은 같거나 아니면 다르다. ‘병과 옷감’은 다르고, ‘만들어진 것’과 ‘무상한 것’은 같다. ‘무상한 것’과 ‘만들어진 것’ 둘은 인연 화합에 의해 성립하는 동일한 체성이고, 서로 의존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같다. ‘무상한 것’과 ‘만들어진 것’ 둘은 동일한 체성이지만 언어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는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배제하는 것[廻遮]이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배제하는 것이 다른 것은 우리들의 인식 상에서 각기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만들어진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무상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을 이유로 ‘소리의 무상함’을 논증한다.
동일한 본성에 배제하는 것이 다른 것을 『입중론석』에서는 “모든 실상의 자성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즉 세속과 승의이다.”고 하여 법성을 가진 것 각각의 본질에 세속과 승의의 본성 둘씩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제가 동일한 본성이 아니라면 하나의 법성에 존재할 수 없다. 책상에 있는 꽃병을 보고 ‘꽃병’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이고, 바닥에 떨어지면 순간적으로 깨어져버리기 때문에 꽃병의 자성이 빈 것이 승의이다. 따라서 모든 일체법은 세속과 승의 둘을 가지게 된다. 일체법에 세속과 승의 둘이 있기 때문에 세속과 승의 둘은 동일한 본성이다. 동시에 성립하고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병에서 세속과 승의는 반드시 동시에 성립한다. 승의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속의 법에서 승의를 인식하기 때문이고, 승의가 아니고서는 세속법이 끊임없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2. 세속제
세속제는 범어로 samvrtti satya, 티벳어로 kun rdzob bden pa라고 한다. samvrtti와 kun rdzob은 ‘완전히 장애하는 것’, ‘방해하는 것’에 해당한다. 본질을 장애하여 올바른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하는 실집이 세속이다. 이러한 실집의 측면에서 진리이기 때문에 ‘제(諦, satya, bden pa)라고 한다. 중생이 실체로 집착하는 측면에서 제법이 현현하는 방식과 본질적인 방식이 일치하는 것처럼 현현하기 때문에 세속이다.
『현구론』에서 월칭은 세속을 실상을 장애하는 것, 서로 의존하는 것, 세간의 언설 셋으로 설명한다. 그 중에서 실상을 장애하는 것이 세속제에서 세속이 본래 의미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세속의 사례일 따름이다. 『입중론』에서도 “어리석음은 자성을 장애하기 때문에 세속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허구인 것이 진실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부처님께서 세속제라고 말씀하셨다. 허구가 되는 실사를 세속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세속제’와 ‘세속’은 구분된다. 성불하지 못한 중생 중에서 일부는 현현하는 법을 실체로 고집하는 이도 있고, 고집하지 않는 이도 있다. 전자를 ‘세속제’라고 하고, 후자를 ‘세속’이라고 한다. 실체로 고집할 경우에만 ‘제’를 붙여 세속제라고 한다. 『입중론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와 같이 유有의 갈래에 섭수된 번뇌에 물든 무명력으로 세속제를 세운다. 번뇌에 물든 무명을 없애고, 행行을 영상 등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는 성문‧연각‧보살들에게는 허구 자체이고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환술처럼 연기하기 때문에 세속이 될 따름이다.”
언급한 것처럼 세속제는 번뇌에 물든 무명력으로 세운다. 그러나 번뇌에 물든 무명 자체를 토대로 세속제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인아집이나 법아집의 대상이 되는 자아를 고집하는 것은 번뇌에 물든 무명이지만 그러한 자아는 언설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제가 아니다. 번뇌에 물든 무명이 자재自在한 측면에서 세우는 것이 세속제이다. 성문의 성자는 번뇌에 물든 무명이 없기 때문에 색법 등의 제법에서 단지 이름을 붙이는 미세한 연기만을 보고 자성을 보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이 될 따름일 뿐 세속제가 되지 않는다.
세속제는 사물에 대해 진리인 것이 아니라, 실체로 고집하는 측면에서만 진리이기 때문에 세속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허망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병 같은 것을 허망한 인식대상으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토대를 실체로 고집하는 대상을 논리적으로 논파하는 견해를 획득해야 한다. 실체를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못하면 허망한 것을 바른 인식으로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귀류논증파에 따르면 무명에 물든 자가 자상自相으로 성립하는 것으로 현현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무명에 물든 것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허망한 전도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세속제를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입중론』에서 “세속에서 허망한 것은 세속제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말을 배운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얼굴의 영상影像과 같은 것은 얼굴에 대해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세속제가 아니다. 허망하고 기만하는 인식대상을 보고 획득할 경우 세속제가 된다.
귀류논증파에 따르면 눈병이나 담병 또는 거울․햇빛 등 일시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원인에 물들지 않은 여섯 가지 인식, 물든 여섯 가지 인식, 앞의 여섯 가지 인식으로 파악한 여섯 가지 대상과 뒤의 여섯으로 파악한 여섯 가지 대상 중에서 잘못된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 여섯은 잘못된 세속이고, 잘못되지 않은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 여섯은 올바른 세속이라고 한다. 이것은 세간 또는 언설의 인식을 근거로 올바른 또는 잘못된 세속을 설정하는 것이다. 『입중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온전한 육근六根으로 파악한 것을 세간이 현증한다. [이것은] 세간에서 진실한 것이고, 나머지는 세간에서 잘못된 것이다.”
3. 승의제勝義諦
승의제의 의미를 『현구론顯句論』에서 “의미[義]이기도 하고, 수승하기[勝] 때문에 승의勝義이다. 그것이 진리[諦]이기 때문에 승의제이다.”라고 한다. ‘수승한 것[勝]’은 가장 수승한 성자의 근본지根本智인 평등지平等智를 의미한다. ‘의미[義]’는 이 성자가 가진 지혜가 작용하는 대상[所行境]의 의미를 가리킨다. ‘제諦’는 허망하지 않고 속임이 없는 법의 본성을 의미한다.
세속제는 무명의 아집我執으로 안립安立하고, 실체로 고집하기 전에 안립하기 때문에 진리가 된다. 승의는 빈 것으로 안립하기 때문에 ‘수승한 의미’가 곧 진리가 된다. 승의제가 진리인 것은 기만이 없는 것이고, 그것도 존재하는 방식과 현현하는 방식이 다른 형태로 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眼識으로 본 것을 내심內心으로 분별하여 병 등에 실체가 있다고 분별하지만, 병 등의 실체는 없다. 진실로 통달한 지혜는 현현하는 것과 그 법성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다.
승의제는 『입중론』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올바른 인식대상[소지]의 의미를 보고서 획득한다고 설명한다. 올바른 인식대상의 의미가 빈 것이고, 허망한 인식대상이 세속이다. 빈 것의 의미를 보는 지혜가 궁극적인 것을 관찰하는 지혜이고, 언어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와 같은 궁극적인 것을 관찰하는 지혜로 획득한 의미를 통해 안립하는 것이 승의제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측면에서 승의제를 설명한 것이다.
『입중론석』에서 “그 중에서 승의는 진실한 것을 본 이가 가진 수승한 지혜의 대상으로 자체의 자성을 증득한 것이고, 자체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승의제는 본성이 하나다.”라고 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무루의 지혜로 획득하는 것이고,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에는 한없이 깊은 것을 아는 지혜[如所有智]와 한없이 넓은 것을 아는 지혜[盡所有智] 둘이 있다. 여기서 승의제를 통달하는 지혜는 한없이 깊은 것을 아는 지혜다. 이 지혜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 승의제이고, 승의제 자체는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한없이 깊은 것을 아는 지혜를 증득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눈병 걸린 눈으로는 허공에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것을 보지만, 눈병에 걸리지 않은 눈으로는 허공에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것을 결코 보지 못한다. 무명의 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지혜의 눈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온 등의 법에서 실체를 보게 되고, 이것을 집착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그러나 무명의 습기習氣를 완전히 없앤 사람과 배우는 단계의 성자는 근본무루지根本無漏智로 온 등의 법에서 자성을 보지 못한다. 온 등이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온의 무자성을 본다. 이것이 온의 실상인 진실한 공성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승의제다.
『입중론』에서 “눈병 때문에 머리카락 등의 본성을 잘못 분별한 것을 청정한 눈으로 보고, 그것이 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다. 『입중론석』에서도 “눈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머리카락 등을 보는 것처럼 무명의 습기가 없는 불세존이 온 등의 자성을 보는 것이 불세존의 승의제다.”라고 한다.
출처: http://donghaksa.or.kr/new/donghakji/tong_02.php
중관학 강의: 인무아人無我 (by 양승규) (0) | 2011.12.14 |
---|---|
중관학 강의: 법무아法無我 (by 양승규) (0) | 2011.12.14 |
밀교의 올바른 이해 (by 허일범) (0) | 2011.12.14 |
지혜와 자비의 이중주, 티베트 불교 (by 주민황) (0) | 2011.12.14 |
티베트 문화와 불교 (by 주민황) (0) | 2011.12.14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