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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티벳 망명민 불교 (by 이지수)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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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티벳 망명민 불교



글쓴이 : 이지수 (동국대 교수)
출 처 : 월간『금강』 2545년 3월호


인도의 이해 -「인도의 티벳 망명민 불교(티벳 불교)」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 인도의 불교 부활에 있어서 마하보디 협회와 암베드까르의 신불교운동과 더불어 티벳 망명민들의 불교가 갖는 역할도 적지 않다.

A.D 7세기, 송첸감뽀 왕의 불교귀의와 그리고 인도의 샨따락쉬따(寂護)의 인도 방문과 더불어 시작된 티벳의 불교는 오늘날까지 천삼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중국의 선불교, 남방의 테라와다 불교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형성했다.

경전들이 학승들(티벳인과 인도인)에 의해 다른 시대에 도입됨에 따라 여러 집단들이 서로 독립된 조직으로 자라났고 그 결과 티벳불교는 네 개의 주요 교파로 갈라졌다.

인도의 밀교수행자 빠드마 삼브하와가 창립한 닝마, 마르빠가 창시한 꺄규, 아난다 가르브하가 창시한 샤꺄, 그리고 쫑카빠에 의해 수립된 게룩의 네 교파가 그것이다.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된 기본적 교리를 갖고 있다.

한국불교는 단일한 교리체계와 수행방법을 고집함이 없이 여러 요소가 포괄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비구나 비구니계를 받을 때는 테라와다의 율장을 따르고, 경전공부에 있어선 금강경이나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따르고, 수행에 있어선 중국화된 불교인 선불교의 행법을 따르며, 의식에 있어선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기 위한 진언이나 작법 등 밀교를 따르는 것과 같이 티벳불교도 정식 승려가 되는 수계는 소승의 율을 따르고, 경전공부는 대승을 따르며, 수행은 금강승(밀교)을 따르는 식으로 소승·대승·금강승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또 우리의 불교가 칠성이나 산신신앙과 같은 토속신앙과도 습합되어 있듯이 티벳의 토속신앙인 본교와도 습합되어 있다.

우리의 불교와 특별히 구별되는 점은 한국불교는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에 바탕하고 또 중국적 불교인 선수행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에 비해 티벳불교는 인도의 범어불전을 직접 티벳어로 번역한 티벳장경에 바탕하면서 인도의 빠드마삼브하와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진 밀교행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중관학파 특히 귀류논증적 중관철학을 중요시한다.

티벳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어지는 달라이 라마가 종교적으로나 세속적 정치 모두에서 최고 수반으로 계승되는 제도이다.

뛰어난 학승이자 티벳불교의 개척자인 쫑카빠(1357∼1419)는 보살의 화신으로 믿어졌는데 그가 죽자 그의 수제자인 간덴(1391∼1474)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그를 첫 번째 달라이 라마로 하여 현재 제14대 달라이라마(텐진 갸쵸)에 이르고 있다.

불교를 처음 티벳에 도입한 송첸감뽀 왕은 불법을 티벳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티벳문자의 제정을 도모하였고, 그의 탁월한 대신인 통미삼브호따를 인도에 파견하여 나란다 대학에서 범어와 범어문자(데와나가리)를 연구하도록 하였고, 그로부터 티벳문자가 만들어졌다.

그후 인도의 범어불전들이 티벳어로 번역되었고, 그 결과 깐규르(경장)는 1108종의 경이 108권으로, 땡규르(논장)는 4566종의 논서가 225권으로 편집되기에 이르렀다.

티벳의 건조하고 한랭한 기후 탓에 오랜 옛날에 인도로부터 가져온 패엽경 사본들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티벳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범어 원본으로 읽을 수 있는 용수나 무착, 세친, 법칭의 논서들이 영원히 소멸되어버렸을 것이다.

과거의 티벳엔 5천 개 이상의 승원(곰빠)들과 사원(라캉)들이 티벳 전역에 퍼져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테뿐, 세라, 간덴의 게룩빠 사원들은 이만명 이상의 승려들을 수용할만큼 규모가 컸다.

그러한 사원들은 수도 도량일뿐 아니라 또한 탕까나 만달라, 불상의 조형 등 티벳 특유의 불교 미술품들과 도서관, 승원대학을 갖춘 교육기관의 역할도 겸한 실로 티벳문화의 센터이기도 했다.

인도의 티벳 불교

1949년 10월 1일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하에 들어갔고, 그 다음 해인 1950년 10월 7일 중국은 ‘삼백만 티벳인민들을 제국주의자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구실로 티벳을 침공했다.

티벳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국의 간섭과 압박에 저항하였으나 마침내는 1959년 4월에 달라이 라마(제14대 텐진갸쵸)가 인도로 망명함으로써 완전히 독립을 잃게 되었다.

그때 8만 5천명의 티벳주민들도 그와 함께 인도 국경을 넘었고 1994년 통계에 따르면 총 13만명의 티벳인들이 고국을 떠나 그 중 10만여명은 인도에, 만5천명은 네팔에, 그리고 천오백명 정도는 부탄에, 그리고 4천 6백여명은 스위스와 미국으로 망명했다.

불교의 종주국이면서 또 불교에 호의를 갖고 있던 당시 인도 수상인 네루의 도움으로 달라이 라마는 서북인도의 히마짤 쁘라데쉬에 있는 다람샬라에 자리를 잡았다.

초기의 충격과 당혹을 극복한 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나마 티벳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조처를 취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 후 최남단의 까르나따까로부터 최북 인도의 라다크에 이르기까지 인도아 대륙에 흩어진 티벳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인도 안에 재건하고자 다각적으로 노력해 왔다.

티벳 망명정부가 자리잡고 달라이 라마의 거처가 있는 다람샬라는 티베탄 라이브러리(도서관), 티벳 미술·공예센터, 의료센터, 티벳사원(축락 캉), 티벳 어린이 마을, 남걀 승원, 토론 대학 등을 갖춘 티벳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문자그대로 ‘인도의 작은 라사(티벳 수도)’가 되었다.

더욱이 1989년에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여받고 전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 공인받으면서 다람샬라는 전세계로부터 티벳문화와 불교를 접하고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려는 방문객들로 북적거리는 관광지가 되었다.

티벳망명민들은 인도에서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는 최선의 길은 티벳에서 중국에 의해 파괴된 사원들을 중요한 것만이라도 인도에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티벳의 사원을 모방하여 소규모이지만 인도에 몇몇 사원들을 다시 세웠다.

예를 들면 세라와 간덴, 데뿡 승원과 유사한 것을 문고뜨와 까르나따까의 비라꾸뻬에 세웠다. 이들 승원엔 각각 두 개의 승원대학(대짱)이 있다.

이 밖에도 아루나짤 쁘라데쉬의 봄딜라엔 규또(上 밀교대학)과와 같은, 그리고 까르나따까의 훈사르엔 규메(下 불교대학)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세웠다.

최근엔 본래 1610년 남(南)라사의 도르지닥에 세워졌지만 1959년 중국의 침략 때 파괴된 사원을 정확하게 복제한 사원이 쉼라 가까이 까숨빠띠에 재건되었다.

이 승원엔 탈출한 라마들이 티벳으로부터 가져온 귀중한 불전들과 상징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승원엔 또한 불교철학과 밀교, 의례(작법)를 가르치는 ‘툽뗀 도르지닥 에완촉가르 연구소‘가 있다.

히말짤 쁘라데쉬에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티벳 승원을 깡그라 지역, 떼실 빨람뿌르의 한 마을인 비르에 있다.

티벳 정착민들에 의해 지어진 비르 복합건물은 다섯 개의 사원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쉐랍 링’(지혜의 땅)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방문객을 위한 숙소, 명상을 위한 은둔소 등을 갖추어 정신적, 문화적, 의료와 교육적 요구를 충당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티벳불교와 명상수행을 위해 인도와 해외로부터 많은 방문객을 끌고 있다.

석존의 초전법륜 장소인 사르나트(녹야원)에는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티벳학 연구소인 ‘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고등티벳학 연구소)가 세워졌다.

티벳불교 연구를 위한 다른 두 개의 연구소가 있는데 하나는 라닥의 레에 있는 ‘School of Buddhist Philosophy’(불교철학원)이며 다른 하나는 시킴의 간톡에 있는 ‘Sikkim Inistitute of Tibetology and Buddhist Studies’(시킴 티벳학·불교학 연구소)이다.

1965년 달라이 라마가 창건한 뉴델히의 ‘티벳 하우스’(티벳의 집)는 인도에 있어 티벳 예술과 문화의 가장 중요한 센터이다. 이것은 단지 티벳의 문화적 전통의 보전과 유지를 위해 기여할뿐 아니라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는 인도와 해외의 학자들과의 상호교류에도 기여하고 있다.

‘티벳 하우스’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티벳의 예술품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고, 티벳과 범어 사본, 그리고 종교와 문학에 관한 책을 구비한 도서관, 그리고 인도에 망명한 티벳인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진열한 엠포리움이 있다.

1965년에 티벳 하우스 박물관이 처음 개관되었을 땐 38개의 탕까와 42개의 불상, 59개의 의례와 가사에 관련된 물건들, 그리고 장신구, 화폐 등 모두 139점이 전시되었을 뿐이지만 그후 계속 증대되어 왔다.

특히 38개의 탕까 가운데엔 부처님의 전생담 가운데서 19가지를 묘사한 여섯 개의 탕까가 있으며, 이것들은 16세기에 그려진 중부티벳의 양식들이다.

티벳 하우스의 도서관엔 5000개의 목판본과 티벳어 사본에 대한 2000장의 사진판이 보관되어 있다. 또 독립된 영서 방엔 연구가들을 위해 티벳학, 불교학에 관한 도서들이 진열되어 있다.

티벳 하우스에선 수시로 불교논리학, 철학 그리고 명상에 관한 강의와 토론이 열리며, 일년에 한 번은 학덕이 뛰어난 라마를 모시고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법회를 열기도 한다. 그밖에 티벳어 클라스를 운영하고 연구부와 출판부도 갖고 있다.

1960년대에 티벳의 고승인 걀와 까르마빠도 라마들을 포함한 많은 수의 티벳인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하였고, 시킴의 마지막 법왕(최갤)인 빼덴 통둡 남갤(1923∼1982)의 권유로 시킴에 정착하여 티벳의 쭈르푸에 있는 까규 승원을 거의 복제한 ‘룸떽 법륜센터’를 산 정상에 지었다. 이 사원은 승원대학과 명상센터도 구비하였고 까르마 까규빠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센터가 되었다.

인도에서 또 다른 중요한 까르마빠 승원은 뉴델히에 있는 ‘까르마빠 국제 불교원’으로도 알려진 ‘까르마빠 법륜센터’이다.

이 승원은 시킴에 있는 ‘룸떽 법륜센터’를 본딴 것으로서 티벳양식의 건축과 규모, 그리고 화려한 장엄으로 인상적인 사원이다.

이 ‘법륜센터’(Dharma Chakra Centre)는 학문과 예배를 위해 지어졌으며, 불교학도(특히 까규교파)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든다. 여기엔 커다란 강당과 강의실,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명상을 위한 홀 등이 있다.

인도, 스리랑카, 태국의 테라와다 불교와의 교섭으로 오늘날 인도의 티벳불교는 티벳에서와 달리 사원에서 석가모니불의 불상에 보다 더 많은 비중을 주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태국이나 미얀마의 사원을 보고서 티벳의 전통사원에서 석존의 불상 외에 갖가지 이상스럽게 보이는 수호신들을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해 경책하였다.

티벳 바깥에서 망명민으로 살고 있는 티벳인들은 불교적 이념에 따라 또 그들이 부처님처럼 존경하는 달라이 라마의 교시에 따라 비폭력과 평화주의를 수호하고는 있으나 그들이 언젠가는 자유를 찾고 그들의 고향인 독립 티벳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버리고 있지 않다.

그래서 1950년 10월 8일 중국 공산당이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짓밟은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행사의 하나로서 해마다 10월 8일이면 평화시위를 벌이고, 중국 군대에 의해 학살된 수많은 티벳인들과 승려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회와 법회를 열고 있다.

나라 전체가 불교국이고 또 독특하고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창조한 티벳에서 수천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하고 또 인종 말살정책에 따라 갖가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불교도로서 가만히 좌시하고만 있다는 것에 대해 자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불교계 일각에서 티벳 망명민을 돕기 위한 모임이 있긴하나 아직은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더 많은 학승들과 불교학도들이 티벳불교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한국불교도 보다 풍부해지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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