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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티베트로의 불교 도입 (by 이태승)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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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티베트로의 불교 도입


* 글쓴이 : 이태승 (동국대 강사)
* 출 처 : 불교신문 연재 "불교사 100장면" 가운데 티베트 불교 부분.

 

삼예의 종론

티베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8세기말경의 일로,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기원 1세기경과 비교해 보면 대략 7백년 정도 이후의 일이 된다. 그리고 지리적 여건상 티베트는 인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아울러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에서의 불교 도입도 또한 인도와 중국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이러한 관련이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티베트의 삼예(bSam yas) 사원에서 거행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와 대론으로 소위 "삼예의 宗論"으로 알려진 御前論爭이다. 티베트의 불교 전래초기에 거행된 이 논쟁을 계기로 티베트의 불교는 방향을 새로이 확립시켜 독자적인 불교의 역사를 전개시켜 가게 된다.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지는 것은 명군으로 알려진 티송데첸(742-797)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송첸감포(581-649)왕 시대에 불교는 티베트에 전해진다. 불교의 전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송첸감포왕의 중국과 네팔에서 맞아들인 부인들이다.

송첸감포왕은 그의 아들인 궁송궁첸(621-643)왕의 부인으로 唐에서 文成公主를 맞이하지만 궁송궁첸왕이 일찍 죽은 까닭에 후에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한다.문성공주는 죽은 자신의 남편인 궁송궁첸왕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사(Ra mo che, 小招寺)를 건립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송첸감포왕의 또 다른 부인인 네팔계통의 티춘(khri btsun)왕비도 남편인 송첸감포왕이 죽은 뒤 투르낭('Phrul snang, 大招寺)사를 건립하여 망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중국과 네팔의 두 왕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실제 송첸감포왕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약 반세기를 지나 중국에서 金城公主가 들어온 뒤 부터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남편인 티데축첸(704-754)왕을 설득시켜 황폐해진 라모체사와 투르낭사를 복구시키고 또한 새로운 절을 세우게 했다. 아울러 중국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불교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본교(티베트 전통종교)도를 중심으로한 반불교세력의 저항도 나타나지만, 왕비의 노력은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티테축첸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사정은 변하여, 실권을 잡은 반불교세력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추방하는 등 불교 전래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나이 어린 티송데첸왕으로 그에 의해 불교는 비로서 티베트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티송데첸왕은 성년이 되자 권신들에 의한 파불정책을 배척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선왕인 티데축첸왕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불교를 배워온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며, 특히 그 중에는 삼예의 종론 때에 불교계의 최고 지위에 오른 페르양(dPal dbyangs)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양은 중국에서 귀국 도중 淨衆寺 無相 金和尙을 만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하지만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당시 네팔에 체재하고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725-783)를 티베트에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다시말해 티송데첸왕은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산타라크시타는 <섭진실론> <중관장엄론> 등을 지어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 특히 이 샨타라크시타의 사상은 후에 제자인 카발라실라의 사상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 사상의 바탕을 형성하게 된다.그러나 티베트에 들어간 샨타라크시타는 그다지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오게 되며, 후에 다시 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두번째로 티베트에 들어갈 때 샨타라크시타는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으 며, 이 파드마삼바바의 주술적 능력에 의해 당시의 반불교세력이 제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하여 불교 도입의 틀이 형성된 티베트는 775년경부터 왕의 명령으로 삼예 대승원이 건립되고 대본당이 완성된 779년에는 샨타라크시타가 계사가 되어 최초로 티베트인에게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에 최초로 승단이 형성하게 된다.

또한 티송데첸왕은 삼예 대본당에서 왕비와 고관들을 모아 숭불의 조칙에 서명케 하고 불교를 정식으로 국교화시켰으며, 이로부터 범어불교경전의 번 등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불교문화가 전개되어 간다.이와같이 티베트는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중국과도 왕비의 혼인 등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강성하여 "토번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특히 786년경에는 돈황을 함락시켜 기세를 드높였다. 이 돈황 함락을 계기로 티베트에 들어온 사람이 중국의 선승 마하연으로, 그의 <不思不觀>의 선은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하연은 왕비의 후원을 얻어 크게 세력을 떨쳤지만, 이미 형성된 인도 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과 왕에 의해 한때 선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 측의 강력한 항의와 자살하는 자가 속출하는 사태에 이르러 해금령이 내려지고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왕에 의해 시도된 것이 바로 "삼예의 종론"이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은 이미 샨타라크시타에 의해 예견되어진 일로서, 산타라크시타는 유언으로 후에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제자인 카말라실라(740-797)를 부르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을 기억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카말라실라를 부르도록 하고, 삼예 사원에서 논쟁을 시켜 진 쪽은 티베트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삼예 사원의 논쟁이 곧 "삼예의 종론"으로 이는 티베트 불교의 향방이 걸린 운명적인 대사건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명한 부든(Bu ston)의 <불교사>에 의하면 이 논쟁은 티송데첸왕 앞에서 마하연이 먼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에 대해 카말라실라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행됐다. 먼저 마하연은 일체 행위를 부정하고 <불사불관>에 의한 돈오를 설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것에 대해 카말라실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사불관>은 기절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그것은 반야에 대한 智마저도 버리는 것이라고 논난한다.또한 카말라실라는 無分別智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智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순차적으로 달성되어 얻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돈오적인 마하연의 선종과 수행 자체적인 카말라실라의 논쟁은 반복되었지만, 결과는 결국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돌아가고 마하연은 돈황으로 추방된다.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적인 방향을 명확히 견지하게 되었고, 아울러 카말라실라가 남긴 <수습차제> 3권은 후에 아티샤, 총카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티베트 불교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인도 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 점수와 돈오의 대립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확립한 티베트불교는 이후 인도불교문헌의 본격적 번역과 연구등이 이루어져 불교국가로서 기틀을 확립시켜 간다.



아티샤의 활약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향방을 정한 티베트는 티송데첸 왕의 죽음(797)으로 일시적인 파불상태에 직면하였지만, 9세기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불교국가로서 발전하였다.

인도불교의 경론이 다수 번역되어진 것은 물론 804년 티데송첸 왕(776-815)은 唐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한역불전의 번역도 아울러 촉진시켰다.

그 후 카르충에 불전을 건립하고 다시 숭불서약의 조칙을 발포해 신하들에게 서명케 하였다. 역경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번역어의 통일을 위해 "결정역어"를 수록한 어휘집 <飜譯名義大集>을 편찬하고, 이어서 814년에는 이들 어휘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을 해설한 <二卷本 譯語釋>이 편찬되었다.
터데송천왕을 이은 티축데첸(806-841)왕 시대에 불교는 더욱 융성하였다.
824년에는 티베트 최초의 역경목록인 <덴카르마 目錄>이 만들어져 그때까지 번역된 경론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이 왕시대에 불교에 대한 우대는 더욱 두드러져 출가자 1인에 7戶의 예민이 주어지는 등 극단적인 우대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우대책으로 불교가 발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재정에 영향을 주어 후에 토번제국이 와해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티축데첸 왕 이후 다르마왕은 파불을 단행하였고, 그리고 그의 사후 일어난 왕조 내의 분열은 토번제국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불교교단도 경제적인 기반을 잃고 사실상 해체된다. 이는 티송데첸왕 때에 형성된 티베트 불교교단이 토번제국의 붕괴와 함께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것을 의미한다.

이후로 불교교단은 각 지역의 씨족 세력과 결탁하여 독특한 형태의 종파불교를 형성하게 된다.843년경 토번제국 붕괴뒤 대략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前傳期(snga dar)와 後傳期(phyi dar)로 나누어진다.

전전기의 불교가 국가의 통제력 아래 있었던 "국가불교"라고 한다면, 후전기의 불교는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종파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세기에 걸쳐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혼란한 상황에서 전개된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 후기의 밀교 영향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체계적으로 전승된 밀교 교학이 아니라 잡박하고 실천적인 탄트라 경전이 개별적으로 전해져 티베트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전전기의 <이권본역어석>의 서문에서도 특히 性的 실천을 포함한 <無上 僧伽탄트라>의 부류로 분류되는 탄트라 경전에 대해 번역을 금지하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이러한 탄트라 경전류가 국가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에 있던 티베트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삼예의 종론"으로 불교의 방향을 정립한 많은 티베트인들에게 국가의 통제력 상실속에서 유행하는 탄트라 경전들이 우려와 걱정을 일으키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잡박한 교리의 亂舞 속에 후전기의 불교역사는 계율과 불교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불교교단의 재흥을 목표로 전개된다.

후전기의 티베트 불교는 먼저 계율부흥운동과 뒤이어 아티샤(Atisa, 982-1054)의 활약으로 시작된다.

불교의 재흥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출가 승단의 확립과 계율 전통의 부활이 급선무임을 자각하였고, 이러한 자각은 11세기초 티베트의 동부와 서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동부에서는 캄(Kham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며, 서부에서는 가리(mNga' ris) 지방을 중심으로 계율부 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동부의 계율 전통을 일반적으로 <低地律>, 서부의 전통을 <高地律>이라 부른다. 이러한 계율의 확립은 후전기 불교 전개에 초석을 이루었다. 특히 <고지율>의 전통에서는 후에 대역경승으로 이름을 떨친 린첸상포(958-1055)와 곡.렉페셰랍 등이 나타나 후전기 불교 확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같이 하여 교단의 상태가 정비되자 가리왕인 장춥외(Byang chub 'od)는 인도 비크라마실라 승원의 대학승인 아티샤를 티베트에 초청했다. 아티샤는 벵갈지방의 샤호드국 왕자 출신으로 가리왕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入二諦論> <中螟敎誡論> 등을 지어 이미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초청에 응한 아티샤는 1042년 서티베트의 토딩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린첸 상포를 만나 장춥외의 요청으로 <菩提道燈論>을 저술하였다.

장춥외가 아티샤에게 저술을 요청한 것은 아티샤의 사상을 확인하려는 티베트 왕의 신중성을 엿보게 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장춥외 왕이 티베트 불교를 재흥시키는데 아티샤의 사상이 적합한 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보리도등론>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수행도를 밝힌 것으로, 그 내용은 聲聞乘章.波羅蜜乘章.眞言乘章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아티샤는 먼저 사람들에게는 下士.中士.上士의 세 부류가 있어서 하사인 人天乘과 중사인 성문 연각의 二乘, 상사인 大乘은 각각에 적합한 수행을 함으로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보살의 깨달음은 계율을 바탕으로 삼매에서 이루어지며 아울러 그 수행의 깊이는 바라밀승에서 진언승으로 순차적으로 깊어져 간다고 말하고 있다.

수행에 대해서는 "바라밀승장"에서 보이듯 순차적인 방법으로서 次第와 修習이 강조되며 특히 "無分別의 正觀외 수습"은 菩薩地에 들게 하는 것으로 이러한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붓다와 같은 깨달음은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라밀승의 수행이 궁극에 이르는 사람에게 "진언승장"에 의한 수행이 필요하고, 진언승에 의해 불교의 수행이 완성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불교의 수행을 설하는 <보리도등론>은 장춥외 왕뿐만 아니라 당시의 티베트인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혼란기의 티베트 불교교학을 체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티샤는 그 후 돔톤(1005-1064)과 곡.렉페셰랍 등에 의해 중앙티베트에 초청되어 포교와 역경에 종사하였고, 마지막에는 라사 근교에 네탕에서 돔톤 등이 바라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아티샤의 13년간에 걸친 포교와 그의 주위에 모여든 티베트 승려들의 활동은 불교가 재흥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러나 출가자 집단이 출현하였어도 교단을 통일적으로 원조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아 각 집단은 지역의 특정한 씨족과 결합하여 독특한 종파불교를 형성하였다.

아티샤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에 생겨난 종파가 카담파(bKa'gdams pa)이다. 카담파는 아티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것은 아티샤의 <보리도등론>을 종전으로 존중한다는 의미이지 아티샤를 개조로 삼는 것은 아니다. 보통 카담파의 개조로 간주되는 사람은 직제자인 돔톤으로 그는 1058년 라뎅에 밀교도량을 세웠다.

이 돔톤의 제자 가운데 탄트라 불교의 실천을 중시하는 "敎誡派"(gDams ngagpa)와 "보리도등론"과 <카담大宗典>을 중시하는 현교주의적인 "敎說派"(aZhung pa)가 생겨났다.

후자의 대표로는 포타와(1031-1105)와 샤라파(1070-1141) 등을 들 수 있다. 또 아티샤를 라사에 초청하여 환대한 곡.렉페셰랍은 1073년에 상푸(aSang pu)寺를 세웠다.

특히 이 사원은 조카인 로덴셰랍(1059-1109)과 챠파.최키셍게(1109-1169)를 座主로 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티베트를 대표하는 대학문사로서 수많은 학숭이 몰려들었다. 이와같이 아티샤를 기원으로 한 카담파는 후에 총카파를 개조로 하는 신카담파-게룩파로 흡수되어지지만, 티베트 불교형성에 토대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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