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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이야기 by 짱유화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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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얼차 속의 골동푸얼차

푸얼차의 흥망은 청나라 왕조의 성쇠에 따라 운명을 같이 했다.

조선의 문고에서도 보이듯 푸얼차의 명성이 가장 조명을 받은 때는 청나라 중기부터 후기까지였다.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가 1911년에 망하자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새로이 구성된 한족의 나라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40년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극심한 피폐에 시달린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변방에서 생산된 푸얼차가 중앙에 공급되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되었고 결국 푸얼차는 중앙지배계층의 기억 속에 점차 잊혀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것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푸얼차란 이름조차 모르고 지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운남 현지의 푸얼차 생산은 위축되지 않았다.

 

비록 중앙에서의 시장은 앓었으나 광활한 티베트, 몽고, 위그르 등 서역의 소수민족들이 주소비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광대한 서역시장의 수요는 푸얼차의 생명력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고, 푸얼차를 취급하는 상점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상인들은 푸얼차를 두 가지 품질로 나누어 만드는데, 서역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은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긴차 혹은 병차였으며 수유차의 원료로 쓰였다. 고급 찻잎ㅇ로 잘 만들어진 산차와 원차는 주로 해외시장으로 나갔다. 당시 운남성의 푸얼차의 찻잎은 오늘과는 달리 모두 야생종이었으며, 차나무는 喬木 혹은 반교목이었다. 당시의 푸얼차는 찻잎을 덖어 숨을 죽여 비빈 후 햇볕으로 말린 방법 즉 전통가공법으로 만들었다. 또한 야생 찻잎은 일반 찻잎과는 달리 카테킨의 함량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미노산, 당류 등의 상대적으로 높기에 카테킨의 떪은 맛을 상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푸얼차를 生茶로도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때의 원료가 야생 찻잎이었기 때문이다. 푸얼차의 생명력은 생차뿐만 아니라 묵힘으로써도 나타나는데 그 매력이 있다. 이러한 장점은 푸얼차를 저장 가능케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고, 생차와 묵은 차 두 가지 형태로 상품화하게 된다.

 

푸얼차는 묵을수록 생기는 톡특한 맛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차상점들은 순환판매(循環販賣) 방식을 택하여 매년 새로 만든 푸얼차는 창고에 저장해두고 묵은 푸얼차를 연도에 따라 값을 매겨 거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물론 운송 또는 보관해야 하는 차는 증기 알력을 주어 덩어리로 만들어 통풍이 잘되고 서늘한 창고에 저장하였다. 당시 푸얼차를 취급하는 상점의 집합지는 이무(易武)였다. 이무는 소위 찻잎이 좋다는 6대차산에 있었고, 유락, 혁등, 의방, 망지, 만단, 만철 등 6대차산을 가리켜 통상 이무차구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인 차 상점인 복원창(福元昌), 동경호(同慶號), 경창호(敬昌號), 동창호(同昌號), 송빙호(宋聘號) 등이 모두 이곳에 가게를 열어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생한 돌림병은 푸얼차의 상업근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곳에서 돌림병의 파장은 운송수단인 마방까지 미치게 됐는데, 각지의 마부들이 전염병이 두려워 이곳 출입을 거부한 사태는 이무 차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과거에 아주 빈번하게 왕래했던 마방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푸얼차 상점들도 잇달아 휴업하게 된다. 공산 중국의 등장은 개인 상점마저 허용하지 않는 정책 아래 이무의 푸얼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해 그 화려했던 영화를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산물이라 여긴 예 푸얼차는 문화혁명 때 모두 불태워졌고, 그나마 지구상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50여 년 전 다마고도를 통해 동남아를 거쳐 홍콩 상인들에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희소가치가 있거나 유서 깊은 기물 또는 서화 등의 미술품을 가리켜 공동품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골동품이라 불리는 골동푸얼차한 편을 먹을 때마다 가치가 두배로 뛰어 어느덧 호가는 있어도 거래가 없는 골동 중의 골동으로 푸얼차 마니아로부터 추앙 받고 있다.

 

 

 

푸얼차 속 인자푸얼차

 

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인자푸얼차의 공이 절대적이다. 인자(印字)’란 푸얼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하다. 사실 앞서 출하됐던 골동푸얼차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다.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골동푸얼차은 푸얼원차라고도 하는데, 한 편의 중량은 7량 곧 지금의 357g이었으며,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대체로 찻잎을 증기로 가공할 때 차상점들이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한다.

 

제품포장을 보면 죽통으로 싼 7편의 푸얼원차에는 포장지가 없었고, 다만 7편의 푸얼원차를 죽순으로 마무리 포장할 때 상호를 가리키는 도안 및 문구를 인쇄한 큰 종이 곧 내표(內票)’ 7편 중 최상단의 원차 위에 깔아 출하한 것이 이들 개인 차상점들의 공통된 포장법이다. 내비와 내표는 모두 차상점들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푸얼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근거 없는 제품은 생명력이 결여 되기 마련이며 자생력 없는 상품은 소비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푸얼차가 겉 포장지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때부터이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3년만의 일이다. 사유재산제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이다.

 

그 일환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푸얼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 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된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자로 둥근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자를 새긴 마크로 되었다. 여기서의 자는 중국을 말하고 ()’이란 발()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색상에 있어 자를 붉은 색으로 태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인 색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을 내포되어 있고, ‘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팔중차로고가 탄생된 후 푸얼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 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 차 상점 곧 무포장 푸얼차 제품의 근거지가 이무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푸얼차 제품의 중심지는 맹해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는 푸얼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이다. 인자를 대표하는 후얼차로는 홍인(紅印), 녹인(綠印), 황인(黃印) 등 제풍이 있으나, 대체로 홍인과 녹인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명칭은 출시 때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니고 후일 시장상인들에 의해 붙혀진 상품이름이다.

 

그냥 푸얼원차로 출하됐던 차를 어째서 색으로 새로이 분류되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일까 ? 그 연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쇄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5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었던 인자급 푸얼차의 포장지에는 사실2가지 색상밖에 없다. 팔중차 로고 중 자만 녹색으로 돨 뿐 남은 글자는 모두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에 출하된 푸얼원차 상품에서 자를 비롯해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물이다.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때의 상품을 후일 홍인이라 명하게 된다. 이후 포장지의 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되는데, 이 제품을 녹인이라 불렀고, 이어 잉크 배합비율의 실수로 인해 자가 노란색을 띈 것을 황인이라 했다. 그리고 홍콩의 상인들이 붙인 인이라는 이름이 대만사람에게 건너가 남인(藍印)으로 불리고 또 한 차례 변신하게 된다. 홍인과 녹인의 차 맛은 다르다. 또한 인자급이라도 인쇄지와 글씨체에 따라 여러 가지의 맛이 배어난다.

이는 찻잎은 농작물이기에 해마다 품질이 같을 수가 없고 찻잎의 원료와 배합비율에서 생긴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푸얼차 속의 광운공병

 

누군가 철관음이 부드러운 새색시 같다면 푸얼차는 강력한 남성을 상징한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바로 강인하고 중후한 푸얼차 맛이 세계 차인들의 혀를 단숨에 사로잡아 어느덧 푸얼차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차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어찌 보면 푸얼차가 근세기에 들어와 이렇게 웅비할 수 있는 것은 홍콩,마카오,타이완 등지의 상인들이 그 중심자리에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특별한 맛을 상징하는 푸얼차를 더 매혹적이고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발로 그들의 상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로부터 중국 내의 푸얼차 소비시장은 티베트, 몽고, 위그르 등 서부소수민족이였으며, 해외의 주요시장은 홍콩, 마카오, 타인완이었다.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홍콩과 마카오는 자유무역과 항만기능을 이용하여 세계의 물류중심지로 각광을 받은 것은 5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이곳은 수많은 보세창고가 있었으며 여기에 필요한 하역 인부의 수는 상당했다. 이들이 해갈용으로 마시던 차는 대부분 주전자에 끓여 마실 수 있는 값싼 윱보차(六堡茶)와 푸얼차였다. 공산중국 초기의 차 수출에 관한 업무는 주로 상해시와 복건성의 하문(廈門) 그리고 광동성의 광주의 수출입공사에서 이루어 졌다. 당시 운남에는 세관의 검사를 거친 수출입화물에 대한 관세를 납부하고 면장을 발급 받는 통관허가증도 없어 푸얼차에 관한 수출은 모두 중국광동성차엽진출공사에서 대행해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소위 인자푸얼차의 수출은 대부분 이 결로를 통해 홍콩과 마카오로 갔다. 광동에 있는 차엽진출구공사는 운남푸얼차에 관한 수출 업무뿐만 아니라 운남에서 푸얼차 원료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도 했다.이 기관은 수출통관을 무기로 삼아 운남에 푸얼차 원료를 요구했던 것이다.이에 운남에서는 부득이 매년 수 백톤의 푸얼모차를 이곳에 공급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달관계는 1973년 운남 자체에서 자영으로 수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할 때까지 계속 이루어 졌다.

 

광동은 예로부터 자체적으러 차를 만들었다. 물론 주 판매지역은 홍콩과 마카오 였다. 그들은 광동의 찻잎, 심지어 베트남의 찻잎을 가져와 차를 만들어 왔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운남의 찻잎을 최대한 이용하여 잎차인 산차 그리고 푸얼원차와 같은 병차를 만들어 홍콩 등지에 팔았다. 시장에서 이병차를 가리켜 광동(廣東餠)이라 한다. 광동병의 내비는 인자푸얼차의 팔중차를 본떴으나 포장지 없이 7편을 쌓은 형식은 골동푸얼차와 같다. 죽순껍질로 포장하여 홍콩 등지에 팔았는데,반응은 꽤 괜찮았다고 한다.

 

금속틀로 압제해 운남의 것 보다 단단했으나, 운남 찻잎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일정한 고객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물론 운남이 아닌 광동에서 만들어진 제품이었기에 운남푸얼차 보다는 몇 갑절 싸게 유통되었다.오늘날 시장에서 연도 푸얼차 중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차가 바로 이 광동병이다. 광동병은 1990년 대에 들어와 상인들의 각색으로 광운공병이라는 이름으로 환골탈퇴하게 된다. 광응 광동지역에 만들었다는 뜻, 운은 원료가 운남의 것, 공병은 조공으로 바칠 만큼 질이 좋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광운공병의 짝퉁이 많다는 것이다.

 

짝퉁 푸얼차란 아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에만 해당되면 성립된다. 하나는 푸얼차의 상표 또는 제작연도를 속이는 것, 다른 하나는 푸얼차의 산지를 속이는 것. 여기서의 푸얼차원료란 운남지역에서 생산된 찻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운남 이외의 지역에서 난 찻잎은 푸얼차의 모양을 흉내낼 수 있어도 푸얼차의 진미를 재현할 수 없기에 짝퉁이라 부른다. 지금 시중의 짝퉁 푸얼차는 광운공병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1973, 운남에서 자체적으로 수출업의 기능이 생기자 광동이란 지역적 이용가치가 떨어져 푸얼차의 원료공급을 중단시켰다. 이에 73년 이후 만든 모든 광운공병의 원료는 운남의 것이 아니기에 전부 짝퉁으로 분류된다.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푸얼차는 어느 지역의 찻잎으로 만들어졌는가 ? 운남인가 아니면 광동 또는 동남아 찻잎인가. 그 판단의 가름선이 1973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푸얼차 속 칠자병차(七子餠茶)

 

칠차병차의 유래는 골동푸얼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운송수단인 마필이 견딜 수 있는 60kg의 무게와 수송 길이 였던 다마고도의 통행여건에 의해 둥근 푸얼차의 무게는 357g으로 정해졌다. 이때 푸얼차의 총칭은 푸얼원차(圓茶)라 했으며, 개별상점에서 만든 푸얼차는 모두 자신들의 상호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오늘날 병차와 원차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재질의 푸얼차로 존재했다. 당시 상인들은 푸얼차의 품질을 두 가지로 나눠 만들었는데, 고급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둥근 차를 원차라 하여 주로 해외시장에서 판매한 반면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것은 병차라 하여 판매대상은 주로 서역지역이었다. 즉 둥근 모양은 같으나 원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중국공산 치하 아래 처음 만든 둥근 푸얼차 곧 인자푸얼차의 포장지를 보면 중차패원차(中茶牌圓茶)’라는 글귀가 있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고급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 원차이다. 지금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고 있는 둥근 형태의 푸얼차는 대부분 칠자병차이다. 칠자병차는 푸얼원차의 전통 포장법과 같이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칠자병차의 이름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운남의 민족문헌에 따르면 칠자(七子)’다복다손(多福多孫)’ 의미며, ‘병차(餠茶)’는 둥근 모양의 푸얼차를 가르킨다고 적혀있다. ‘칠자병차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지는 알 수 없으나 인쇄물오서 등장하게 된 해는 1973년부터다.

 

이는 문화혁명 때인 1972년에 그동안 운남차엽공사운남성라고 불였던 회사의 이름을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 中國土産畜産進出口公社雲南省茶葉分公社)’로 개명한 후 .비로서 포장지의 인쇄물에 칠바병차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흔히 푸얼차의 시대적 흐름을 고대와 현대로 나누는데, 그 가름의 잣대가 바로 1973년이다. 1973년은 푸얼차의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던 해다. 회사 이름을 바꾼 것을 비롯해 자체적 수출업무기능의 실현 그리고 미생물발효(인공발효 ?)의 탄생 등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 해부터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고대 푸얼차와 현대 푸얼차의 차이는 발효에서 나타난다. 고대 푸얼차의 발효는 자연산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푸얼차의 발효는 미생물오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푸얼차는 다시 골동푸얼차 즉 호자급(號字級)푸얼차와 인자급(印字級)푸얼차로 나뉘지만 모두 자연발효에서 진화된 상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골동푸얼차를 제1세대,인자푸얼차를 제2세대 그리고 현대푸얼차를 즉 1973년 이후의 푸얼차를 제3세대 푸얼차라 부른다.

 

1세대 푸얼차는 이무(易武)의 개인상점에서 만들어졌던 반면 제2세대와 그리고 제3세대 푸얼차는 모두 국영 맹해차창을 중심으로 생산된 제품이다. 그리고 지금 푸얼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신제품들을 가리켜 제4세대 푸얼차라 부른다.

 

3세대 푸얼차 즉 현대푸얼차의 또 다른 이름은 숫자급푸얼차라고 한다. 시장에서 이를 숫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자급과 인자급의 명칭에 관한 흐름을 일관성 있게 맟추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미생물발효의 탄생을 기점으로 푸얼차 출하공장을 곤명(昆明)공장은 1. 맹해(盟海)공장은 2, 하관(下關)공장은 3번이라고 지정하여 제품을 관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3세대푸얼차, 현대푸얼차 또는 숫자푸얼차라고도 일컬어지는 칠차병차의 탄생은 미생물발효공법에서 비롯되었다. 미생물발효를 쾌속발효 또는 인공발효라고도 부른다

 

1973년 미생물을 통해 쾌속발효 시킨 미생물발효 푸얼차의 등장은 푸얼차의 기존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유통시장 질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위적인 고온다습한 공간을 통해 배양한 미생물의 작용은 찻잎의 산화를 인위적으로 가속시켰으며 이러한 공법을 가리켜 학계에서는 후발효작용(後醱酵作用 Post-fermentation)’ 또는 악퇴변색(渥堆變色 Pile-fermentation)’이라 부르기도 했다.

미생물발효푸얼차에 대해 중국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1979년 운남성 정부가 발표한 운남성푸얼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이다.

 

푸얼차란 운남성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녹차긴압차(綠茶緊壓茶)가 시간이 경과에 따라 찻속에 함유되어 있는 여러 효소 성분들 ,특히 폴리페놀 중심으로 자연발효 되어 차색이 변하는 동시에 색다른 맛과 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차의 변화는 오래 묵힐수록 그 향미를 더욱 느낄 수 있는 것이 푸얼차의 진가다.

 

푸얼차의 자연발효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폐쇄적이고 낙후된 운남성의 교통망에 의한 장기간의 운송기간에서 온 발효였다. 오늘날은 운남성의 교통이 발달되어 1년이 소요됐던 운송을 단 며칠 혹은 몇 시간 안에 이룰 수 있는게 됐다. 이에 지난날 운송수단에서 비롯된 자연발효의 맛과 향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는 푸얼차쾌속발효가공법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쾌속발효가공법이란 물과 습도, 온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발효한 가공법으로서 1975년 곤명차창에서 생산한 후 점차적으로 맹해, 하관, 보이차창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동안의 가공법에 나타난 여러 난제들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이 얻어 이제 운남 각 지역의 차공장에서도 푸얼차를 생산하고 있는 실태이다. 이에 운남성정부는 푸얼차 품질의 제고를 보다 유효하게 관리하기 위해 아래 같은 시행령을 발표한다.

 

이것이 운남성푸얼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의 모두 내용이다. 모두내용 중 푸얼쾌속발효공법이 개발된 시기는 1975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푸얼차쾌속발효공법이 1973년에 개발되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응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의 푸얼차발효공법 및 설비개혁시험에서 였다. 그러나 내용 중 “1973년부터 곤명차창은 쾌속발효공법을 개발하였으나 대체로 경험을 통한 생산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과학적인 데이터의 부족은 결국 발효과정 중 찻잎변화에 대한 관찰 및 찻잎 성분에 대한 변화를 파악하는데 미흡하였고 또한 획일적이지 못한 발효주기와 열악한 설비로 인해 푸얼차의 생산방식은 무척 낙후된 상태였다라는 부연설명을 보아 소위 숙병(熟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미생물발효차 즉 칠자병차의 상품화는 1975년 이후부터 시작된 일이라 볼 수 있다.

 

운남성 정부가 운남성푸얼차제조공법시행규칙 1979년에 이르러 발표한 것을 보면 쾌속발효공법이 비록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되었으나 기술상의 제반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해의 시험을 거쳐 비로소 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푸얼차의 쾌석발효공법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회자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일화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1973(일설은 1974),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의 부경리 송문경(宋文庚)과 오기부(敖其富)씨가 중국차무역박람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그들은 전시장에서 얻은 광동지역에서 만든 지금과 같은 유사한 샘플을 가지고 당시 곤명차창 공장장인 이희금(李希金)씨에게 보여줘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이 차창이 오계영(吳啓英, 2005년 작고)을 불러 샘플을 살펴본 결과 차의 외형이 튼실하고 색은 흑갈색이었으며 등급은 9-10급의 청모차(靑毛茶) 즉 쇄청모차가 창고에 쌓여있어 처리하는데 골칫거리였을 때였다. 이원료는 청전, 즉 오늘날의 생전의 원료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창고에 있는 원료를 소화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이 제의는 곤명차창으로 하여금 푸얼차의 미생물발효를 제작하는데 있어 시험용 원료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미생물공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푸얼차 샘플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 발수차(發水茶)의 근거지인 광동지역에 맹해차창의 추병량(鄒炳良)과 동행하여 학습한 후 개발한 것이 열발효였다. 열발효란 쇄청모차 원료에 수증기를 가해 일정한 시간을 통해 산화시켜 모차의 외형을 흑갈색으로 만드는 공법을 말한다. 이 공법을 수차레 실습하여 개발한 것이 쾌속발효인 미생물발효공법이다.

 

미생물발효의 푸얼차를 만드는 1차 공정은 녹차와 같다. 다만 사용하는 찻잎 원료는 대부분 함수량이 적은 쇤 찻잎이기에 먼저 10% 정도의 물을 뿌려 찻잎의 함수량을 높인 후 녹차와 같이 솥의 고온을 빌려 찻잎 속에 있는 효소 성분을 억제시켜 발효가 일어나지 않도록 살청(殺靑)이라는 공정을 한다. 이에 비비는 유념과정을 거쳐 세포조직을 약 15-30%를 파괴시키는 동시에 찻잎을 줄기 모양으로 만든다. 유념된 찻잎을 햇빛 아래에 건조해 함수량이 10%정도가 되도록 하는데 이렇게 1차적으로 만들어진 반제품의 차를 가리켜 모차, 또는 쇄청모차라고 한다.

 

쇄청모차를 악퇴(渥堆)의 공정을 거쳐 만든 것이 쾌속발효푸얼차이다. 악퇴공법이란 물과 습열 등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미생물들이 촉매작용을 일으켜 찻잎 속의 화학물질들로 하여금 산화, 분해 등의 일련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악퇴 또는 퇴적이라고 하는 과정은 주로 곰팡이에 의한 호기성(好氣性)발효로 이루어 졌는데. 호기성발효란 미생물들이 산소를 좋아하여 공기 속에서 잘 자라는 성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르킨다. 특히 푸얼차의 경우 다섯 검체에서 Aspergilus 15,Penicilium 4종이 분리되는 것으로 보아 푸얼차의 주요한 미생물이 곰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40-60일 정도이면 발효의 공정을 마치며 완성한 잎차를 가리켜 푸얼산차라고 하나 상업적으로는 푸얼숙차라라고 한다.

 

숫자푸얼차의 어려움은 상품포장지 그 어느 곳에도 숫자에 관한 정보가 표기되어 있지 않는데 있다. 사실 숫자푸얼차의 탄생은 해외 시장인 홍콩을 겨냥한 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자푸얼차의 포장은 357g X 7편을 한 통에 담아,12통을 대광주리에 담는 것이 전통포장법이다. 이때 상품의 출처를 알리는 전지를 만들어 대광주리에 한 장 넣은 것이 당시 유통의 관리 형태였다.푸얼차 시장에서 이 전지를 가리켜 지비(支飛)라고 한다.

 

푸얼차의 지비 내용에는 상품명칭,출고공장,중량 특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칠자병차의 레시피 7542,7572 등과 같은 문구가 바로 이 매두란에 적혀있다.

 

매두라는 단어는 중국의 표준어가 아닌 홍콩,광동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어 ‘Mark’의 홍콩식 표현이다. 이처럼 칠자병차에 관한 정보는 결국 광주리를 통째로 구매하지 않는 한 개별포장으로 된 푸얼차의 포장지만으로는 그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는 차에 관한 정보는 도매상들에게만 알려줄 뿐 소비자들은 상인들의 입에만 의지하는 이상한 유통구조로 변질되어 결국 짝퉁 푸얼차가 창궐하는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푸얼차의 정보부재는 소비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일부 푸얼차 애호가들, 특히 타이완의 마니아들이 칠자병차의 포장지들을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수 십 종에 달하는 포장지의 재질, 인쇄명도, 글자의 차이점 등을 정리해 이를 토대로 소비자들에게 칠자병차의 진위에 관한 판별법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부분은 아래와 같다.

 

칠바병차의 포장지에는 둥근 원을 중심으로 상단에는 운남칠자병차(雲南七子餠茶,영어병기)’ 중앙에는 팔중차(八中茶)’ 로고 그리고 하단에는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차엽분공사(영어병기)’ 등의 글자가 적혀 있다. 인쇄에서 판별 할 수 있는 자료로는 상단 운남칠자병차에서의 자와 자의 상이점, 하단 중국토산부분에서 인쇄된 자의 크기 그리고 팔중차로고의 의 색상, 내비에 인쇄된 서쌍판납태족자치주맹해차창출품라는 문구에서 자와 자의 차이점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내표의 대소의 크기와 인진배방(認眞配方)’라는 문구를 특별히 추가하여 편집한 내표 등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차성(茶聖)이라 불리는 육우(陸羽)는 다경(茶經)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무릇 차의 좋고 나쁨은 오직 구전비결에 있다(茶之臧否存於口訣).

 

그는 750년대에 표피적이 아닌 차의 장.단점을 함께 논하고 감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차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이에 몇 가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구전비결에 따라 부단히 지식을 연마해야만 진정한 차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전한 바가 있다.

 

푸얼차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데 있어 첩경 즉 지름길은 없다. 진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부단히 푸얼차의 과학,역사를 연마 그리고 연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푸얼차의 진위 판별법에 있어 포장지에서 나타난 여러 사안들은 결국 곁가지에 불과한 참고사항이라는 뜻이다. 육우의 일침은 오늘날의 푸얼차에도 유효하며 푸얼차 애호가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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