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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普洱茶)의 역사와 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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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普洱茶)의 역사와 산지

 

서기 225년, 제갈공명이 난중을 평정하고 차의 관련된 일을 시작하다.

 

제갈공명이 남쪽을 정벌했을 때 장병들은 물이 맞지 않아서 몸이 약해지고 병도 많이 생겼다.현지인들은 차를 끌어서 약으로 썼는데, 복용 후에 장병들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제갈공명는 원정의 피로를 씻어 낼 수 있음을 보았기에 차나무를 보물이라 여겨 나중에 공명은 차산을 두루 방문하여 각 민족에게 민중을 인도해 차나무를 많이 심으게끔 분부했고 찻잎의 장려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이차 원산지 중의 하나인 고 육대 차산은 바로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며 널리 차산을 방문하였을 때 남겨 놓은 유물의 기념으로서 이름을 얻은 것이라 한다.

 

고 육대차산은 지금은 서쌍판납(西雙版納) 주에 속하고 기낙(基諾)차산은 경홍시(景洪市)의 관할 하에 있다. 기타 5차산은 맹랍현에 자리 잡는다.맹랍은 태족의 언어인데 차나무를 심는 곳이란 뜻이다. 육대차산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는 모두 멀지 않으며, 모두 비슷한 환경과 기후 및 품종을 갖고 있다, 이런 조건 덕분에 육대차산에서 나온 우수한 보이차도 그 명성이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

 

의방(依幇)은 육대차산의 맹주였고 고 육대차산 중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다. 당시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들러 간 사람은 10만 명에 이르고 차의 생산량은 지금의 50Kd을 넘어서 당시 청나라 조정에 차를 공물로 바치는 주요 차산이 된다.

 

의방차는 잎눈(葉芽)은 가늘고 긴 모양이며,은색 빛이 나며, 맛은 아주 진하고 뒷맛이 감미롭다.여가적으로 보면 원차(圓茶)의 생산으로 유명하다.마을위원회 문 앞의 건륭(청나라6대황제 1735-1795) 도광(청나라 8대황제 1820-1850)과 광서(청나라11대황제 1875-1908)시대에 만든 세 개의 비석에는 차산 역대의 중대한 일을 기록해 두었고, “차”는 의방 사람의 마음속에 숭고한 위치에 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기낙산(基諾山), 즉 유낙산(攸諾山)이고, 지노족의 신성한 고향이다 차산의 동서 길이는 75km이고,남북 넓이는 50Km이다. 역사상 일찍이 차산의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었다. 지노족은 스스로 공명의 후손이라 일컬으며 공명을 차의 조상이라고 한다.공명의 모자모양을 따라서 집을 짖고 제사할 때도 공명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른다.

 

만장(曼莊)과 만살(曼撒)차산은 동서로 연결되어 있다. 북쪽은 의방산이고, 혁등산(革登山)과 연결되어 있고 남서쪽의 이무정산(易武正山)과 인접해 있다. 만장은 맹랍현 상명향(象明鄕)에 속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차의 잎눈은 눈처럼 하얗고 차의 맛은 독특해서 보이차의 중 진귀품이 된다. 만살차산은 만랍향에 속해 있다. 이 차산에서 나오는 차는 잎은 넓으며 비대하고 튼튼하며 차인들로부터 보이차 중에 가장 남성적인 강건한 기질을 가진 차라는 영예를 얻는다. 청나라 시대부터 동남아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차의 명성은 동치(同治 청나라 8대 황제 1873)13년 까지 계속돠다가 뚝 그치게 된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된 3번의 화재 때문에 차산 꼭대기부터 전부 차나무가 없어지게 된다. 남은 몇 십 구루의 큰 차나무들은 지금도 차산을 지키고 있으면서 만살의 옛 거리와 옛 시절의 휘황을 추모하고 있다.

 

혁등 차산은 기낙 차산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러 마주 보고 있다. 여기는 전설에 의하면 공명이 차를 성행시킨 성지이다. 이 곳에서 나오는 차싹은 튼실하고 가늘며 부드러운 잔털이 가득 휘감는다. 민간에서는 이차를 대백차(大白茶)라고 한다.

 

지금 차산들의 흥성을 이끌고 세월의 틈에서 꿋꿋하게 그 오랜 생명을 이어 가는 차산은 여전히 이무 차산이라 할 수 있다.

 

산마다 차원이 있고 여기저기 다 인가가 있다. 지금까지 보존된 고차원은 700여묘(1 666.7m2)낙수동(落水洞),교두촌(橋頭村) 등지에 있는 대차수(大茶樹) 등은 나이가 이미 수백 년에 달한다. 이무산 고차수 들은 모두 교목형대엽종(喬木型大葉種)으로 훌륭한 보이차를 제작하는데 있어 우수 품종들이다. 그 줄기가 크고 굵으며 차의 맛과 향은 짙고 그윽하다.차를 만들어 오래 보관한 후에는 찻물색은 홍갈색이 되어 오랜 향이 생동감 있게 나타난다.

 

특히 이무산의 봄싹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아름다움을 지녀 보이차 중의 최상의 상품이 된다.

이무는 차로 인해 흥했으며 차로써 이름을 떨친다. 이무 차산의 한창 때는 청 옹정(雍正) 2(청나라 5대황제 1723)부터 시작한다. 보이차는 정식으로 궁정의 공차안책(貢茶案冊)에 올려지게 된다.청나라 건륭(乾隆)9년 즉 1744년이다. 청나라 선통(宣統)3 1910년까지 167년 동안 연속하여 차를 받치게 되어 조공차를 만드는 차 가게는 한 때 이름을 날리게 된다.

 

예공진사(例貢進士)_ 차순래(車順來)차순(車順)() 차장(茶莊) :차순래(이무산에서 차순호 차장을 열어 차를 만들었으며 성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합격하였다)이 이무정산 칠자병차(易武正山七子餠茶)를 바쳤기 때문에 광서(光緖 청나라11대황제 1894)20년에 황제의 하사품으로 서공천조(瑞貢天朝)라는 간판을 받았다. 이무는 조공차의 고향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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