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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 강의: 인무아人無我 (by 양승규)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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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아 (人無我)


양승규
/중앙승가대학교 강사


중생들이 끝없이 윤회하는 것은 업을 짓고,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업을 짓는 주체가 있고, 업의 과보를 받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지으면 과보가 생길 때까지 업력이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고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업과는 한 생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내생 또는 몇 생 후에 그 과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업력은 몇 생에 걸쳐 동일한 주체에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이러한 동일한 주체가 존재해야 하고 이것이 곧 자아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서는 동일한 주체로서 존재하는 ‘나’도 그 경우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자아동일성을 가진 자아를 상정할 경우 오히려 윤회의 문제를 바르게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사람의 의미
인무아라고 할 때 인人은 사람으로 번역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보특가라(pudgala)라고 한다. 육도를 윤회하는 가운데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등을 포함한 여섯 종류의 중생을 포함하고, 중생뿐만 아니라 불보살의 성자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이 흑백의 업을 쌓는 이, 과보를 받는 이, 윤회에서 윤회하는 이, 해탈을 위해 수습하는 이, 해탈을 획득하는 이가 된다.
불교에서 자아에 대한 설명은 오온에서 출발한다. 오온 그 자체가 ‘사람’은 아니지만 오온을 떠나 별도로 사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중론석』에서도

마치 갈래를 모은 것을
근거로 수레라고 하는 것처럼
온蘊을 근거로
세속에서 중생이라고 한다
.

고 설명한다. ‘오온을 근거로 세속에서 중생이라고 한다’는 구절은 세속적인 언설의 의미에서 우리는 오온을 토대로 중생을 세울 수 있고, 사람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오온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게송에서 ‘세속에서’라고 한 것처럼 세속으로 한정될 뿐 승의에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경에서 ‘사문과 바라문이 나와 나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이 오온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자아가 있다고 사문과 바라문이 주장할 때 그것은 결국 오온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것’이 곧 오온을 보는 것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사람의 자아가 없음을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가.

 

2. 나의 자성이 없음
앞에서 언급한 것은 나는 결국 오온과의 관계에서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의 토대가 되는 오온과 나는 동일한가 다른가 하는 두 가지 점에서 ‘나’가 실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은 서로를 배제하는 직접적인 상위相違이기 때문에 비슷한 것을 긍정할 경우에는 비슷하지 않은 것을 부정하게 되고, 비슷하지 않은 것을 긍정할 경우에는 비슷한 것을 부정하게 된다.

① 나와 오온이 동일한 경우
나와 오온이 동일하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 이 경우에 세 가지 과실이 생긴다고 한다. 첫째는, 나를 인정한 것이 무의미해진다. 나와 오온이 동일하다면 자성으로 성립하는 동일한 것이다.동일한 것이 자성으로 성립한다면 동일한 것은 승의에서 성립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오온은 동일한 것으로 의식에 떠올라야 한다.자성으로 성립하는 동일한 것은 떠오르는 방식(snag tshul)과 존재하는 방식(gnas tshul)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온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방식과 똑같이 ‘나’가 의식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색’, ‘나의 수’ 등은 자연스럽게 의식에 떠오르지만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오온과 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온의 실재성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실재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나와 오온이 자성으로 동일하다면 온이 여럿인 것처럼 나도 여럿이 되거나, 나가 하나인 것처럼 온도 하나가 되는 오류가 생긴다. 오온은 다섯이다. 다섯이 아니면 적어도 명색名色 둘 이상은 되어야 한다. 만약 온이 둘이 되든 다섯이든 온과 나가 동일하다면 나가 여럿이 되거나, 온이 하나가 되는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셋째는, 나와 오온이 동일하다면 오온이 생멸하는 것처럼 나도 생멸하게 된다. 온이 생멸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둘은 같기 때문이다. 오온은 발생, 머묾, 소멸이라는 유위의 삼상三相을 가진다. 우리의 색이 변하고, 우리의 느낌이 변하고, 우리의 의식은 변한다. 따라서 나와 오온이 동일하다면 삼상을 가진 오온처럼 나도 삼상을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오온이 생멸하는 것처럼 나도 생멸해야 한다.

만약 이때 ‘나’가 생멸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첫째는, 하나로 상속相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성으로 성립한다면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연결될 수 없다. 둘은 각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속하지 못한다면 전생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현생과 전생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업을 행한 것이 없어진다. 업을 지은 이와 과보를 받는 이가 자성으로 성립하는 각각이라면 업의 과보를 업을 지은 이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을 행한 것이 없어지게 된다. 셋째는,행하지 않은 업을 받게 된다.업의 과보를 누구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의 과보를 받더라도 업을 지은 이와 상관없이 과보를 받는다면 행하지 않은 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나와 온蘊 둘이 나눌 수 없는 하나라면 사람의 몸도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오른손이 흔들릴 때 왼손이 흔들리는가, 흔들리지 않는가? 오른손이 흔들리더라도 왼손이 흔들리지 않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와 온 둘을 나눌 수 없는 하나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② 나와 오온이 다른 경우
나와 온 둘이 자성으로 성립하는 다른 것이라면 나는 유위有爲법의 세 가지 특징인 발생
, 머묾, 소멸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오온과 다르고, 오온은 유위법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유위법이 아니라 무위법無爲法이 된다. 법이면서 유위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법일 경우에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나라고 할 수 있는 토대와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나와 온이 다르다면 온의 특징인 형색이 될 수 있는 것을 배제하고 난 다음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반연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을 반연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온과 다른 것이 아니다.

 

3. 나의 것의 자성이 없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고 하는 것이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의 것’도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중론』에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

라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곧 바로 나의 것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자성이 있고 없음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분석하여 따져볼 경우 나의 것이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것’은 반드시 ‘나’라는 인식 상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나의 것’에 대한 사례를 나의 눈·귀 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곧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구생유신견의 대상은 아니다.나의 눈·귀 등은 나의 것을 가립하는 토대가 될 수 있지만, 토대가 곧 그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눈·귀 등을 토대로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하는 것이 곧 구생유신견으로서 ‘나의 것’이다.

 

4. 사람을 환술로 인식함
인아집에 빠져있는 중생들은 나라고 하는 것이 실체로 존재한다고 고집한다. 이러한 고집을 없애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방식으로 관찰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관찰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찰하는 중에는 ‘나’ 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인식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여전히 ‘나’라는 고집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이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환술幻術 등으로 보는 인식을 키워야 한다. 『삼매왕경』에서

아지랑이, 건달바성,
환술, 꿈처럼
형상의 자성이 비었다고 수습하고
일체법도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

고 하고, 『반야경』에서 ‘형색에서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 일체법을 환술과 꿈과 같다’고 한다. ‘환술’의 비유는 환술사가 구경꾼들에게 환술을 걸어 나무토막이나 조그만 돌들을 소
나 말로 보이게 할 경우 구경꾼들은 소나 말로 인식하고 그것이 진짜라고 고집한다. 그러나 환술사에게는 소나 말로 나타나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진짜 소나 말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없다. 환술사처럼, 소나 말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만 실체로 존재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차를 운전할 때 거울을 통해 뒤에 따라오는 차를 보고서 차선을 변경할 것인가 하지 않
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 거울에 보이는 길의 상황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거울을 보고 차
선을 절대로 변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차가 진짜 차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차는 거울 속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내 차 후방에 따라 오고 있는
차를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또,꿈을 꾸면서 우리는 아주 힘든 상황을 겪거나 위험한 순간에 놓이게 되면 놀라 울부짖는 경우가 있다.꿈을 꾸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지만, 꿈을 깨고 나면 우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꿈인 줄 알기 때문이다.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마치 거울 속에 있는 차를 진짜 차라고 고집
하는 것과 똑같다
. 동화책에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고기를 한 점 물고 가는 개가 물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물고 있는 그 고기가 탐나 짖어대자 자신의 입에 문 고기가 물속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과 같다. 자아가 존재한다고 고집하는 중생들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윤회하는 우리의 삶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끌고 간다.

따라서 지관의 행법을 토대로 사람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관찰에서 일어난 다음에도 모든 현현하는 사물 등을 자아가 없는 환술이고 꿈일 따름이라고 봄으로써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http://donghaksa.or.kr/new/donghakji/tong_0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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