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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 강의: 법무아法無我 (by 양승규)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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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아 (法無我)

양승규/중앙승가대학교 강사

 

사람을 시설하는 토대인 오온五蘊, 등의 육계六界, 눈 등의 육처六處 등이 법이다. 이러한 법이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 것이 법무아다. 법무아를 결택하는 방식에는 본질적인 측면과 발생적인 측면에서 법의 무아를 확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전자는 주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의 인으로 설명하고, 후자는 주로 사구四句의 발생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이 법무아를 논증하는 토대는 제법이 연기緣起한다는 연기의 인이다.

 

1.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법무아

유위법은 인과因果의 작용이 일어나는 법이고, 형색形色인식認識불상응행不相應行 셋이 있다. 유위법을 같은 것과 다른 것의 인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형색을 몸과 같은 것으로 설명할 경우, 몸은 사지四肢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사지가 넷인 것처럼 몸도 넷이 되거나, 몸이 하나인 것처럼 사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만약 다르다면 몸은 사지를 떠나 존재해야 하지만 사지가 없는 몸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몸은 하나의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인식도 오늘의 인식처럼 오전의 인식과 오후의 인식 둘 상에서 분별에 의해 가립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성립하는 하나의 인식이 존재한다면, 오늘의 인식은 오전과 오후의 인식과 같거나 달라야 한다. 만약 오늘의 인식이 오전의 인식과 같다면 오전의 인식에 오후의 인식이 있어야 한다. 오후의 인식과 같다면 오후의 인식에 오전의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인식이 오전과 오후의 인식과 같을 수 없다. 오늘의 인식이 오전과 오후의 인식과 다르다면, 오전과 오후의 인식 외에 다른 오늘의 인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경우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인식은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불상응행은 시간 개념인 1년처럼 색법色法과 심법心法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다. 1년과 같은 것이 하나의 실체로 성립한다면 1년은 그 토대인 12개월과 같거나 달라야 한다. 만약 같다면 12개월이 열둘인 것처럼 1년도 열둘이 되거나, 1년이 하나인 것처럼 12개월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만약 다르다면 12개월 외에 1년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경우는 없다. 따라서 1년은 하나의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위법의 자성이 없음은 허공과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허공에는 사방四方간방間方과 중앙中央 등의 여러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허공이 하나의 실체로 성립한다면 허공은 사방 등과 같거나 달라야 한다. 같다면 동쪽의 허공과 서쪽의 허공이 하나일 것이고, 그렇다면 동쪽의 허공에 비가 올 경우 서쪽의 허공에도 비가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르다면 동쪽 등의 허공 이외에 허공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위법인 허공도 하나의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2. 사구四句의 발생을 부정함  

입중론에서는 사구의 발생을 부정하는 것으로 법무아를 설명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자체에서도 아니고, 다른 것에서도 아니다.

둘에서도 아니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사는 어떤 것일지라도

발생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여 네 가지 극단에서 발생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법이 자성으로 발생한다면 자생自生 등 네 가지 발생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결과가 존재한다면 원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둘로 구분되고, 원인이 있는 것은 결과와 원인 둘이 하나의 자성인 것 또는 다른 자성인 것, 또는 두 가지 자성을 취합한 것에서 발생하는 것, 셋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생自生은 인도의 수론파數論派가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씨앗과 싹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싹이 싹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씨앗의 자성과 싹의 자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싹은 씨앗의 자성에서 생긴다고 한다. 무의 싹은 무의 씨앗에서 생기고, 감자의 싹은 감자에서 생기는 것처럼 무 씨앗과 무 싹 사이에는 공통된 자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성이 없으면 무 씨앗에서 무 싹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생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과 본성이 하나인 원인에서 생긴다면 싹은 자체로부터 생긴 것이 되고, 싹은 원인의 시기에 이미 성립한 것이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또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본성일 경우에는 씨앗과 싹 둘에서 형체·색깔··작용 등이 전혀 다름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생은 성립하지 않는다.

 타생他生은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것은 자상으로 성립하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볍씨는 그것의 결과인 모와 자상自相으로 성립하는 것이 다르다. 다른 것에서 생긴다면 불꽃이 타오르는 것으로부터 컴컴한 어둠이 생길 수 있고, 원인인 것과 아닌 것 모든 것으로부터 결과인 것과 아닌 것 모든 것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자상으로 성립하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른 것이 아니라 결과 등에 작용할 수 있는 특별한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당하지 않다. 자상으로 성립하는 다른 것은 다른 것이 그것의 본질이고, 그것은 서로 관련이 전혀 없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둘에서 생기는 것은 자생과 타생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 중에서 자생은 진흙에서 생기는 것이고, 도공 등에서 생기는 것은 타생에서 생긴다고 한다. 자생만으로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생만으로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둘에서 생긴다고 한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논리도 스스로 생기는 것을 자생을 부정하는 논리로 부정하고, 다른 것에서 생기는 부분을 타생을 부정함으로써 부정한다.

원인이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는 것을 설명할 타당한 원인이 없기 때문에 하나에서 생긴다면 모든 것에서 생기고,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준비하며 시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특별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원인 없이 생긴다고 한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고, 악업을 소멸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애를 쓰더라도 목적을 이룬다는 보장을 확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발생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자상으로 성립하는 네 가지 발생을 부정하는 것일 뿐 언설로 발생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네 가지 발생을 부정하는 것은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 즉 연기의 논리로 부정하는 것이다.

 

3. 연기緣起의 논리

연기의 원어는 쁘라띠뜨야 사무뜨빠다(pratītya samutpāda)이다. 이 원어를 많은 논사들은 쁘라띠(prati)’반복되는 것’·‘각각인 것’, ‘이띠(iti)’가는 것’·‘소멸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ya)’를 덧붙여 갈 수 있는의 의미가 되어 각각으로 나아가고 소멸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 연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기의 원어를 분석할 경우에는 원인에서 결과가 생기는 연기의 일반적인 것은 설명할 수 있지만, 단일한 눈을 토대로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에는 반복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청변논사가 쁘라띠등의 의미를 각각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생긴다고 하거나 이 연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이 생긴다고 하는 방식으로 연기를 설명하는 것은 용수논사가 연기 를 의지하는 것발생하는 것으로 구분한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월칭논사는 쁘라띠(prati)’접촉하는 것’, ‘이띠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접미사 가 붙은 것으로 쁘라띠뜨야(pratītya)란 말은 만나는 것’·‘근거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사무뜨빠다(samutpāda)발생을 의미하는 빠다(pāda)에 사무뜨(samut)가 덧붙여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연기의 의미를 인과 연을 근거로 실사가 존재하는 것, 성립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월칭논사는 이상에서 언급한 연기의 용어를 근거로 연기에는 만나는 것’, ‘의거하는 것’, ‘의존하는 것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만나는 것은 원인으로 만나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어떤 원인은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이 만나는 것이다. 의거하는 것은 각각의 부분을 근거로 유위법과 무위법이 성립하는 것이다. 병의 바닥·몸체·손잡이 등의 부분을 근거로 병이 성립하는 것처럼, 의존하는 것은 각각을 시설하는 토대를 의존하여 시설하는 법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귀류논증파가 연기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병은 병을 시설하는 토대를 의존하여 시설하는 것 정도로 성립한다.

 연기하는 것은 시설된 것이기 때문에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자성으로 생기지 않고, 자성으로 소멸되지도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생긴다든지 소멸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생기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존하여 발생한다고 하고, 의존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본성으로 성립하는 것이 비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극단적인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법이 자생 또는 타생 등으로 생긴다고 하는 악견惡見을 끊을 수 있다. 악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법의 실체를 고집하는 상견常見인 증익增益하는 견해와 부정되는 한계가 지나치게 커 언설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까지 부정하는 단견斷見인 손감損減하는 견해다.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연기의 인을 토대로 자성으로 성립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악견에서 벗어난다.

 제법의 자성이 존재한다면 스스로 자유자재로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자성은 상일자재常一自在한 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기하는 것에는 상일자재한 것이 없다.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에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 인연이 성숙될 때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자재한 것도 아니다. 백론에서

 

어떤 것을 의존하여 생기는 것은

자재한 것이 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자재한 것이 없다.

따라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견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제법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세속적인 언설의 차원에서 제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현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병 등은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연하여 시설되고 있기 때문에 자성으로 성립하는 것은 없다. 연기한다고 하는 것은 의존하는 것이고, 의존하는 것에는 의존하여 생긴 것과 의존하여 시설된 것 둘이 있다. 의존하여 생긴 것은 씨앗이 물·양분 등을 의존하여 싹 등이 생기는 것이고, 의존하여 시설된 것은 수레의 부품을 의존하여 수레라고 시설한다. 의존하기 때문에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출세찬에서도

 

고통은 스스로 만든 것,

다른 것이 만든 것, 둘이 만든 것,

원인이 없는 것이라고 외도들은 주장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의존하여 생긴다고 설하셨다.

 

연기하여 빈 것을

부처님께서 비었다고 하신다.

실사에는 자재함이 없다고 설하신 것은

비할 데 없는 부처님의 사자후다.

 

라고 하여 연기의 인으로 하나와 여럿, 단상의 극단, 발생의 네 가지 극단을 부정한다고 설명한다.

 

출처: http://donghaksa.or.kr/new/donghakji/tong_0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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