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양승규 (철학 박사 ; 동국대 강사)
출 처 : 월간 『붓다』 2002년 3월호 (통권 제 169호)
달람살라의 강첸끼숑[큰 눈의 골짜기]이 떠나갈 듯 아침부터 네충(Nechung) 절에서 긴 티벳 나팔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나팔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네충 법당에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법당 밖으로 몰려갔다. 서투른 티벳말로 물었더니 큰 린포체가 오신다고 했다. 그들이 하는 대로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한참을 땅만 보고 있었다. 구부린 허리가 아파올 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티벳 승복을 입은 조그만 아기 스님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큰 린포체라고 해서 근엄한 모습의 노스님을 연상한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저 꼬마가 도대체 누구길래, 뭘 안다고 큰 린포체라고 하는 걸까? 티벳 불교를 전혀 모르고 있던 그때로는 이 낯선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꼬마 스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아기 스님을 '링 린포체'라고 했다.
잠시 후에 링 린포체는 혼자서는 올라갈 수도 없는 법상에 올랐고,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낯선 의식이 법당에서 거행되었다. 법당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찼고, 접신(接神)의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놀라운 경험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험상궂은 신의 모습으로 변한 최蹷[信託者]이 입에서 소리를 내고 거품을 튀기면서 활과 창을 들고 축복을 받기 위해 법상에 앉아 있는 링 린포체께 다가갔다. 나는 순간 무서워서 그 아기 스님이 울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린 린포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 신을 축복해 주었다.
링 린포체에게는 '용진'(Yongs 'dzin)이란 특별한 수식어가 붙는다. '모든 것을 구족한 분'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을 지낸 특별한 분께 붙이는 최고의 찬사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전생의 링 린포체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셨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인들에게 특별한 존재다. 태국인들이 그들의 국왕을 깍듯하게 예우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은 세속적인 통치자일 뿐 귀의할 대상은 아니다. 백성들은 몸을 왕에게 의지하지만 몸과 마음을 바쳐 귀의하지 않는다. 티벳에서는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스승에게 귀의한다. 부처님은 우리들을 직접 이끌어주실 수 없지만 스승은 제자를 직접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왕이 아니라 법왕이다. 모든 티벳인들의 스승이다. 스승 중에서 근본스승이다. 근본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는 모든 티벳인들의 스승이면서 귀의처(歸依處)가 된다.
달라이 라마는 단순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이들과 살면서 이를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환생자의 특별한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이 없이는 새로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달라이 라마의 교육에는 티벳 전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들이 참여했다. 논리학에서 반야부, 중관부, 계율부, 밀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가르칠 스승을 모셔왔다. 그러나 이 모든 교육의 책임은 두 분의 스승인 링 린포체와 티장 린포체가 맡았다. 그러나 링 린포체는 어릴 적부터 달라이 라마의 교육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그 책임감 또한 막중했다.
링 린포체는 스승으로서 엄격했다. 그 자애스러운 미소를 공부하는 중에는 한 번도 보이시지 않았다고 언젠가 달라이 라마께서 회고하신 적이 있다. 엄격하면서 자애스러운 것이 티벳에서의 스승의 모습이다. 게으름을 피울 飁는 호된 질책이 따른다. 달라이 라마의 교육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비록 대중들의 절대적인 귀의처이지만 스승 앞에서는 항상 제자일 수밖에 없었다.
달라이 라마의 교육에서도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초기의 수학 과정 동안 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스승의 허물이라고 생각했고, 급기야는 신탁(神託)을 통해 이 문제의 답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부의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는 정확하고 확실한 이해를 통해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고 스승을 능가하는 대학자가 되었다. 스승에게는 제자의 성취 그 자체가 기쁨이다. 특히 훌륭하게 달라이 라마를 기른 스승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런 점에서 티벳인들은 링 린포체를 존경했다.
전생의 링 린포체는 현교와 밀교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뛰어났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기 때문에 '용진'이 아니라 린포체 스스로가 모든 것을 구족한 분이었다. 마지막 열반에 드실 때에도 스승은 일체의 곡기를 끊으시고 수일 동안 안팎의 호흡을 가다듬어 법상에서 앉으신 채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열반에 드셨다.
열반에 드신 링 린포체를 달라이 라마께서 명상에 들어서 그분이 환생했음을 알았다. 링 린포체가 태어난 집과 그 주변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셨고, 그것을 토대로 조사단은 1985년에 태어난 690명의 어린이 중에서 한 아이를 찾았다. 이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사단을 반겼다. 그중에서 전생의 시자인 꿍오라를 보자 반갑다는 듯이 그 품에 안겼다. 조사단은 전생에 링 린포체가 쓰시던 염주 등을 통해 린포체의 환생자가 확실한가를 시험했고 마침내 1987년 이 소년을 링 린포체의 환생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린포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원만한 행의 결과로 주어진다. 자리와 이타의 보살행은 끝없기 때문에 린포체는 영원히 중생들과 함께한다. 중생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한다. 링 린포체가 한국에 오신다고 한다. 어릴적 그분의 모습에서 환희심을 키운 우리는 또다른 환희심을 그분의 가르침에서 기대한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에서 제자로, 다시 우리들의 스승으로 오시는 링 린포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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