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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유물 파사석탑에대한 허명철님의 글

지복에 이르는 길..../학술, 교학

by O_Sel 2008. 9. 2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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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좋아 인터넷 검색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아래는 김해 금강병원 원장님으로 계시는 허명철의학박사님의 글입니다.
좋은 내용인 것같습니다. 오랜 연구로 내용상의 가치가 많은 것같습니다.
국내 사학자들이 최초 불교의 전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봄직한 내
용이라 생각되네요.






산야를 무심코 걷다가 깨어진 석물이나 토기들을 대할 때가 있다. 이럴때마다 귀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주워서 이리저리 관찰하며 나름대로 음미해 보곤 한다. 김해라는 옛 가야의 왕도에는 문화유산들이 많이 산재되어 있으며 도굴꾼이 하도 많다보니 여기저기 버려진 유물조각들이 많아 문화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 당연한 자세이리라 본다.

김해 구산동 구지봉 산자락에는 사적 제 74호인 가야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 있다. 이 경내에는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시집오면서 가져 온 탑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하도 마모와 파괴가 심하여 두께 20㎝ 정도의 돌 다섯 개를 그냥 쌍아놓은 것 같다.

15년 전의 일이지만 모 신문사 언론인이 김해 허황후 무덤에 뭉그러진 다섯 개 돌덩어리를 쌓아 놓고 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유물이 부족하다보니 뭉그러진 돌을 쌓아두고 야단이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그때 역사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형편없이 망가진데다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탑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이 120㎝의 낮은 것이어서 탑이라는 개념은커녕 돌무더기에 불과하였다. 이 탑이 2000년 전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이라고 전설적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문중에서 겨우 관리하는 정도로 지방 문화재조차도 등록하지 않은 그야말로 잊혀지고 버려진 돌무더기에 불과하였다. 문화재관리국이나 석탑을 전문으로 다루는 불교계까지도 아예 이것을 탑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 밖에 있었다.

과연 탑이 아닐까?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전설인 구전설화는 진실성이 없는 것일까? 나는 구전설화를 믿으면서 2000년 전 역사로 돌아가서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싶었다.

삼국유사 금관성(김해) 파사석탑편에 이 파사석탑은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왕비가 되기 위하여 가야국으로 항해하여 올 때 가져온 것이며, 공주가 양친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야국으로 올 때 파도신(波申)의 노여움을 만나 항해를 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부친께 사실을 고하니 부왕께서 이 탑을 싣고 가게하여 무사히 가야국에 도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탑은 모가 진 사면의 5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조금 붉은 빛의 반전이 있고 석질이 좋아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탑이 波申을 눌러 파도를 진정시키므로 일명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가면 파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고 몰래 조금씩 떼어가 망가뜨렸기 때문에 사각형의 돌이 마치 원형처럼 망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연선사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돌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본초강목이라는 중국 한약책에 보면 婆娑石은 해독작용이 있으며 아주 값비싸므로 가짜가 많아 진위를 가리는 법으로,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나며, 닭벼슬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피가 물로 화하여 흘러내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탑돌아래 아주 적은 파편을 주워서 실험해 본 결과 분명 파사석이 확실하였다.

파사석탑의 '婆娑'의 뜻은 무엇일까? 노파'婆', 춤출'娑' 즉 노파가 춤추는 석탑이 되는데 이런 불탑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한문식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인도의 범어식 뜻으로 음미해 보면 '婆'는 'Bha'로서 진리이고 '娑'는 'Sa'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진리가 현존하는 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도식 석탑명이 분명하므로 인도에서 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실험과 언어적 고찰 등을 하면서 곰곰히 탑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불탑이 확실하다는 심증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것인가 하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약 2000년전에 범선을 타고 죽음의 바다인 인도양을 거쳐서 인도에서 가야까지 항해를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답은 대부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탑을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믿기에는 많은 항해사적 고증이 필요한 것이다.

침묵에 잠든 왕후의 숨결을 느끼며 무엇인가 無言으로 나에게 말하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혀 파사석탑이라는 5층 돌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였다. 이 탑에 관심이 있으면서부터 도저히 하루도 이탑을 나의 뇌리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매일 많은 환자를 보는 바쁜 일과 중에서 아침 저녁은 물론이고 점심식사도 걸러가면서 무수히 뛰어다니며 이 돌들을 음미하게 되었다. 6개월 동안 200회가 넘게 다녔더니 탑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의 열정은 대단하여 우리나라 석탑과 인도의 석탑에 관한 문헌을 모조리 뒤지기 시작하였고, 국내에 산재해 있는 탑 모양이 일반적인 것과 다르다는 석탑이 있는 유적지는 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우선 그 크기와 높이가 비슷하게 낮은 것은 김제 금산사의 6각다층 석탑과 경남 창녕 영산의 함박산의 사찰에 있는 5석으로 만든 석탑을 볼 수 있었으나 그 크기가 아주 낮은 것이 파사석탑과 유사하나 형태면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이 파사석탑은 아무리 보아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석탑 및 부도와 그 형태나 구조면에서도 아주 판이하였다. 그러기에 더욱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형태와 크기로 보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아니고 외국에서 만든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심증에서 계속 탑을 관찰하였다. 때로는 조용히 탑 앞의 잔디위에 않아 명상기도를 올리며 영감을 얻기위해 노력도 하였다.

왜냐하면 가야사를 확립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로 가야문화가 일본문화의 원류라는 차원에서 민족적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후학들에게 확실한 민족사관을 심어주어야 할 강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야사를 구성하는 요소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등 다양하지만 나는 우선 전설적으로 김해사람이라면 누구나 믿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도래지가 고구려(소수림왕 AD 372년)가 아니라 가야(AD 48년)라는 사실에 비추어 종교분야에서 가야불교의 증명, 복원, 확립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황후는 국제결혼을 통하여 인도 아유타국에서 시집오면서 가져온 파사석탑과 더불어 불교를 최초로 전래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모화사상에 물든 저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AD 372년 중국에서 다소 강압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께 전파하는 왕권불교로 이것이 한국 최초의 불교전래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 충렬왕때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AD 48년 허황후가 파사석탑과 함께 최초로 전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삼국유사의 기록은 전설인양 정사로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학계의 흐름이었다.

불교의 전래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삼요소가 성립되어야 한다. 즉, 佛(불상 및 불탑), 法(불경책), 僧(스님)이다. 따라서 가야불교를 증명하려면 옛 가야 땅 어디를 헤매어서라도 불탑을 반듯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6가야 지역을 돌아다녀도 의심가는 탑이라고는 뭉그러진 다섯 돌덩이로 전설을 간직한 이 파사석탑 뿐이었다.

잠깐 불교의 미술학적 이야기를 하자면 인도에서 불상은 언제부터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BC 5세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많은 탑을 세워 사리를 보관하여 부처님을 대하듯 경배하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다. AD 1세기말경에는 부처님에 대한 경애심이 강하여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BC 5세기∼AD 1세기까지는 無佛像시기이며, AD 1세기말 이후부터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즉 허왕후가 시집온 AD 48년에는 인도에서 조차도 불상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허왕후는 불상이 아닌 불탑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탑은 어느 것이며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것을 풀어야 가야사의 수수께끼는 풀리게 되는 것이다.

가야불교의 증명으로 종교문화의 전래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국제결혼을 통하여 평화적이며 자율적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것이 나을 것이고 또, 한국 최초의 불교 전래지가 김해라면 가야 후예인에게 역사적 긍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에서 꼭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명상기도 덕택인지 몰라도 꿈에 파사석탑 아래에서 너무도 아름답고 맑은 백의의 관음보살님이 두 손을 내밀며 당겨달라는 듯 하였다. 그날 밤 꿈을 꾼 후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돌탑에 가서 다시 살피기 시작하였다. 탑돌 아래에 이상한 문양이 보였는데 인도 어느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문양과 비슷하다는 감을 느꼈다.

이 돌탑은 그동안 신성시하여 특히 왕능을 지키는 노인장께서 더욱 그러기에 감히 망그러진 돌을 쌓아 놓은 둣하지만 해체 분해할 생각초차도 할 수 없었다. 또 분해해 본다 해도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200회 이상 다녀도 그저 바라보고 경배시 할 뿐이었다. 그동안 관찰의 대상이 되면서 점점 친숙하게 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더욱더 경배시하였기에 소중히 모시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꿈에서 손을 내미는 것을 미루어보면 꼭 분해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분해한다는 것은 그저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게, 넓고 큰 돌은 아래로, 좁고 적은 돌은 위로 순서대로 쌓아놓은 삼각형 형태를 다시 하나씩 내려놓고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분해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정중히 소중하게 숨을 죽이면서 가만히 가만히 하였다. 놀라웠고 놀라웠다. 그저 이름없는 돌이 아니라 사리보관소의 구멍(지름 10㎝, 깊이 6㎝)이 있는 돌과 사리공을 덮는 뚜껑돌을 발견하면서 이것은 분명히 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물론 사리는 없었다. 그것은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 탑이 원래 허황후가 계신 궁중터 즉, 호계사라는 절터에 있던 것을 약 130년전 김해부사가 왕후께서 가져오신 것이라고 능침 곁으로 옮겨 모시게 하였기 때문이다. 각 돌마다 정교히 측정하면서 무늬모양도 세밀히 관찰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탑의 이름만 있을 뿐, 그 크기나 형태에 대한 기록은 한 곳도 없었기에 이번 분해로 탑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탑을 분석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원형대로 석고를 복원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모양이 삼각형이 안정형이 아닌 역삼각형으로 아래층이 좁고 위로 갈수록 넓고 큰 돌로 쌓이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우리나라에는 아예 없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축소형 스트파 즉, 불탑과 일치하였다. 그 형태, 크기, 문양, 사리보관소, 석질, 탑명 등을 확인 검토한 결과 인도에서 만들어 가져온 축소형 불탑이 분명하므로, 허왕후가 인도에서 불교를 직접 김해로 전파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물적자료가 되었다.

이제 이 탑은 전설이 아닌 삼국유사에 기록된 국보가 분명하므로 지방문화재로서 겨우 등록되어 세인의 이목을 받으며 가야에 남은 유일무이한 국보급문화재가 되었다.
이 긴 여정의 역사풀이로 허왕후께 다소나마 후손으로서 일을 한 듯 하며, 잊혀진 국보급 파사석탑에 새로운 경애심을 느끼며 가야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허명철님은 김해 금강병원 원장님으로 정형외과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서로「가야불교의 고찰」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불교」「허왕후 초행길」등 다수의 논문이 있습니다


출처: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2&eid=aHdh8nbg7HutJmUlAD+ZV3bFQchoSi64&qb=x9GxuSC60rGzwMcgwPy3oQ==&pid=fLPTiwoi5UZssc2GOYosss--320377&sid=SNeWZ8xe10gAAH24Z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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