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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도올만큼만 성서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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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도올만큼만 성서공부하라!



도올 강의에 대한 기독교계의 입방아들

아직 끝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강좌에 대해 벌써부터 이를 왈가왈부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조차 많은 이들이 이번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EBS 교육방송 인터넷에서 하는 거 그냥 좀 다 들어 보고서나 얘기하면 안되나 싶지만, 아무래도 심사가 뒤틀리는 사람들도 있긴 있나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런 현상 역시 도올이기 때문에 발생 가능할 수 있는 사회 현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딜 가도 유달리 튀는 사람이 도올 아닌가. 도올이란 존재는 이미 우리 사회를 읽어내는 아이콘 중의 하나다.

이번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대체로 기독교계에선 자신들의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올의 강의는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났다”면서 비난에 가까운 얘기를 해댄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정당하고 깊은 수준에서 생산적인 신학적 토론이 되지 못하고 그저 알맹이 없이 오고가는 비난에 가까운 말들만 토해내는 경우들이 많아 보인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이 TV에서 유교 논어를 강의하고 불교를 강의할 때만 해도 작금의 기독교계 반응처럼 이렇게 그 시작부터 방방 뜨진 않았지 않나 싶은데, 왜 그다지도 심하게 민감하게 구는 건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기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적 잣대와 보수적 배타성도 한 몫 작동된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도올을 이단이나 혹은 이단 비스무리한 사람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도올의 성서강의와 한국교회의 허접한 성경공부 현실

하지만 굳이 놓고 본다면,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의 한국개신교 문제야말로 도올보다 훨씬 더 우려스럽고 썩어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현재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경공부 시간은 성서문자주의에다가 지극히 교리적이며, 그럼으로써 매우 단조롭고 또한 폐쇄적이다. 나로서는 이같은 한국교회 현실을 함께 놓고 볼 경우, 그것은 작금의 도올보다 훨씬 더 우려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지금까지 끝난 20강 강의에 대해서만이라도 굳이 얘기한다면, 한 마디로 도올의 강의는 <엑설런트급>이라고 평하고 싶다. 왜 그런가. 솔직히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과 위기를 생각해볼 때, 도올의 강의는 성경을 공부함에 있어 이 만큼의 철학적 기반과 예수시대 당시에 대한 배경 이해를 깔고서 하는 성경공부를 나는 보질 못했다. (참고로 도올의 이번 강의는 영어를 배우는 강의라지만 영어는 옵션이고 성서강의가 아무래도 핵심인 듯)

혹자는 도올의 강의도 신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낡은 이론이 아니냐고 얘기하겠지만, 실제로 신학교에서조차 그만큼의 철학적 토대로서 가르치는 데도 정작 드물뿐더러, 설령 그 이상을 배우는 신학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여기서 특히 더욱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자행되는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부실한 성경공부 현실에 대해서다. 즉, 나의 엑설런트라는 평가도 어디까지나 상대적 비교로서 그렇다는 얘기다.

행여 신학교에서 잘 배웠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이 일반 대중들 특히 일반 평신도에게까지 스며들지도 못하고 그저 교리만 주입되고 있는 현실이라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랍시고 하는 교재들 대부분은 성경공부가 아닌 교리공부일 따름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딴 식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기본적으로 도올 강의와도 비교자체를 논할 수 없을 만큼의 매우 유치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거의가 보수 근본주의의 5대 교리들인 1) 성서무오설 2)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 3) 예수의 대속적 죽음 4) 예수의 육체적 부활 5) 예수의 재림 같은 것들을 이미 못박고서 거기에 끼워 맞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는 결코 닫힌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리적 해석만이 전통교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도올도 발끈했나보다. “도대체 누가 전통이냐?”라고 되묻고 있잖은가.

오늘날 학계에서조차 일반화되어 있고, 기독교 서점에 가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성서비평 교재조차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현실을 통해선 차단되어 있거나 전혀 소개되고 있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실은 한국교회가 지닌 심각한 서글픔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토록 열악하니 그 같은 도올의 강의가 어찌 고군분투로 보이지 않겠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현재의 한국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성경공부의 해악은 작금의 도올 EBS 성서강의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한 수준임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그렇게 자행되고 있는 그 같은 한심한 성경공부가 우리 사회의 진보의 흐름을 역행하는 데에 기여하고, 보수반동의 이데올로기와 밀착되게끔 하며, 그러한 사고구조를 가진 인간들을 자꾸만 생산해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의의 여지가 없을만큼의 명백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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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도올의 구약폐기론,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에 더욱 논란이 되었던 것은 도올의 구약폐기론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도올의 구약폐기에 동감은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면 모순된 발언 같지만, 나로서는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점이 있기에 그러하다.

구약은 도올이 지적하고 있듯이 매우 야만스럽고 정복적이며 피를 부르는 그러한 미개한 흔적들을 자주 보이고 있다. 처절한 생존의 절박성에 놓인 약소민족이 갖는 또다른 호전성이 야만적으로 삐져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 속에서조차도 이를 역류하고 있는 상향의 흐름도 같이 있기에 그러하다. 바로 그 상향의 흐름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모태가 되고 있기에 하는 얘기다.

분명하게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약시대의 예언자 전통과 맞닿아 있다. 알다시피 예언자 전승은 구약의 또 다른 한 켠에 있는 왕조전승과 충돌하면서 형성되어 온 약자해방 전통에 서 있는 진영이다. 이들 예언자들이 구약의 열왕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부르짖고 호소하면서 나중에는 상생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메시아(새로운 왕)사상으로 가게 된다. 그 메시아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요, 지배하는 왕이 아닌 섬김의 도를 갖는 새로운 신왕사상이다.

이 상향적 흐름의 진정한 성취는 당연히 신약의 예수사건에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생각건대, 아마도 도올 자신도 이 점만큼은 크게 부인하진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구약과 신약도 각각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놓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구약을 읽는 진정한 맛깔스러움은 원시적인 미개함과 야만스러움 속에서조차 바로 온전한 구원의 역사로 향하는 상향적 진화의 흔적들을 읽어내는 데에 있다. 이 상향이란 도올 스스로도 백두의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을 번역하면서 언급했던 바로 그 상향에 다르지 않은 개념이다.

물론 나름대로 이를 잘 읽어내려면 기본적인 해석학적 훈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신 이해부터 달리해야 하니 말이다. 즉, 구약도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소양만 잘 갖춰진다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차피 성서관의 문제 역시 해석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구약은 그 자체로 서로 상충되는 흐름들이 함께 펼쳐지고 있는, 마치 오늘날에도 살벌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미개한 지구촌 풍경을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는 느낌이 있다. 힘(권세)을 쫓는 인간 욕망의 적나라함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들이 자행하는 짓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야만스럽긴 매한가지인 듯 싶다.

내가 보기엔 우리 가운데는 언제나 <두 야훼>가 있는 것이다. 힘을 쫓고 피를 부르는 야훼와 그에 맞서는 약자해방으로서의 야훼 말이다. 이때 구약성경은 어느 편에 서 있다기보다 현재의 세상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질 않느냐를 마치 거울처럼 보여주면서, 오히려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이냐고 결단을 종용하고 있는 기가 막힌 경전인 것이다.

참고로 혹시 그렇게 성경공부를 하는 곳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들꽃향린교회 김경호 목사의 80주짜리 성서학당을 권하고 싶다. 매우 솔직하게 성서를 공부하는 곳 중의 하나다. 물론 이외에도 더러 있지만, 그냥 대표적으로 추천한 것뿐이다. 내가 보기엔 성경만큼 자기해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경전도 없다고 본다.

구약의 한계와 폐기 여부 문제에 대해선 이외에도 좀더 언급해야 될 지점들이 있지만, 그냥 여기까지만 쓰고자 한다. 어차피 나 자신의 이러한 언급은 사실 도올에게 얘기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한국교회에다 얘기하는 것이기에 괜히 도올 강의에 대해서 아직까진 그다지 왈가왈부 하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분명한 점은, 도올의 구약폐기 언급은 이번 도올 요한복음 전체 강의의 핵심도 아니다. 단지 언론 혹은 보수교계가 옳다구나 가십거리 혹은 트집꺼리를 잡아서 부각이 된 점이 더 크다. 내가 보기에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전부 동의하진 않더라도 보다 유용하게 느껴지는 내용들도 아주 많아서 그 같은 구약폐기 언급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교회여, 제발 도올만큼만이라도 성서공부하라!

그만큼 오늘날의 한국교회 현실은 도올의 성서공부만큼 성서를 전혀 읽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헬라철학이 뭔지, Q자료가 뭔지,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에 해당하는 용어들조차도 신학교 가서나 들어나 볼까. 일반적인 한국교회 안에서는 전혀 나눠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들부터가 교회성도들에겐 그런 건 별로 필요 없다고 여길 것 같다.

언젠가 교회를 아주 오래 다녔다는 신자분과 얘기하던 중에, 예수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하자 매우 깜짝 놀라며 날더러 주님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느냐고 말한다. 예수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신약학계에선 일반화된 이해에 속하지만 한국교회를 십수 년 다녀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같은 기본적인 이해조차도 한국교회 안에선 매우 서프라이즈한 것으로 둔갑되는 이 비극적 코미디가 계속 되는 한, 도올의 강의는 앞으로도 계속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또한 그 반작용으로 도올 강의의 진가는 더욱 더 빛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보 진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신학교수와 이를 배웠으면서도 교회현장에선 장사 안된다고 솔직하게 가르치질 않는 목회자들의 책임도 그만큼 크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들, 거의 공부는 제대로 안한다. 그래도 모르긴 몰라도 설교원고 쓰고 짓고 설교를 하는 스피치들은 잘 하거나 열심히 배우려 할 것 같다. 웅변술을 비롯한 사람들 모이게 하는 수법들 말이다. 하지만 성서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내용의 설교라는 것이 나오겠는가.

그저 관중들 울리고 웃기고 하면서 적당히 교리적 내용으로 짬뽕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울리고 웃기고 하는 정도는 도올도 못지않게 잘 한다. 하지만 도올은 거기에다 나름대로 공부도 더 빡세게 하잖은가. 반면에 오늘날 한국교회 대부분이 성서무오설을 얘기하고 성서문자주의를 고수하는 한, 무슨 놈의 깊은 공부가 나올까 싶다.

나 자신이 백퍼센트 도올에 대해 동의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도올 강의를 그나마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계가 도올 강의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그 스스로부터 자숙하고 반성해야 될 산적한 문제들과 참담한 현실부터나 먼저 직시했으면 싶기에 하는 얘기다. 정말이지 뭐 묻은 개가 정말 뭐 나무래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이미 한국개신교의 코가 훨씬 더 우려스러운 석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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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제발 한국교회여, 그냥 도올만큼만이라도 성서공부를 좀하길 바란다. 나 자신의 이러한 언급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서공부 시간이야말로 도무지 열려 있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깊이가 전혀 없는 치열한 공부과정이 아예 증발해버린 현실에 대해 이번의 도올을 자극삼아 말한 것뿐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바이다.

적어도 도올은 그래도 나름대로 공부를 쌓고서 성경을 지지든 볶든 하였지만, 성서문자주의가 9할 이상이나 지배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선 그 같은 치열한 공부과정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아니 필요없어졌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공부체계가 전혀 아니잖은가. 성서를 읽고도 오로지 교리적 해석에만 눈이 멀어 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는 무신론자든 창조론자든 구약폐기론자든 누구든 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깊은 공부와 열린 대화의 마당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러한 출발에서 보다 설득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성경공부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당연히 종국적으로는 도올의 구약폐기론도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길이 먼 한국교회 변혁에서 볼 때, 도올 강의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고 본다.

오늘날에는 한국개신교에 대한 비판 자체부터가 일반 사회에선 (설령 그것이 멋모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한국교회가 언제까지 우리 사회의 진보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반 사회의 지탄의 대상으로서 남아있어야만 할 것인가.

작금의 한국교회를 위한 변혁은 그만큼이나 절실하고 요원한 것이다.



200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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