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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과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지복에 이르는 길..../지혜, 방편

by O_Sel 2013. 2. 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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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차별지이므로 차별하되
차별상에 빠지지 않아야 깨달을 수 있다
...

 

 

색즉시공과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자성이 없는 허상의 세계이지만 인연으로 인하여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이므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비록 여덟 글자밖에 안 되는 구절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법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조사 어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어 차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상의 공한 이치만을 깨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공한 세상을 열심히 값지게 사는 방법 또한 깨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색즉시공은 이 세상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므로 중생들이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공즉시색은 비록 공한 세상이지만 집착 없이 열심히 세상을 살도록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역대의 많은 조사들은 색즉시공을 주로 보여주었을 뿐 공즉시색까지 잘 보여주지는 않았다. 즉 출가하여 산속에서 수행하면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놓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제하는 대승 수행자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치우침은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많은 조사들이 색즉시공만을 강조한 이유는 중생들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세상의 공함을 강조하여 그 집착을 조금이라도 놓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중생들에게 공즉시색까지 가르칠 경우 색즉시공의 가르침은 잊어버리고 공즉시색만을 마음에 새겨 세상사에 빠져버리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들의 반쪽 가르침은 결국 소승적 수행으로 치우치는 원인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색즉시공을 근본으로 삼아 공즉시색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허상임을 깨치면서 동시에 집착 없이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색즉시공뿐만 아니라 공즉시색까지 가르쳐야 불법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종교인 것이다.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지만 공즉시색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있어서 수행자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많은 수행자들이 차별심을 내지 말라는 경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공즉시색을 실천하는 데에 갈등하고 있다. 차별지인 이 세상에서 차별심을 버리려고 하니 경전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은 차별지이므로 차별이 분명히 존재한다. 남녀가 구분되어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그리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지에서 차별심을 버린다고 해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과 동일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경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차별의 세상에서 억지로 차별심을 내지 않으면 현실과 이론의 괴리가 점점 커지게 되어 결국에는 수행을 포기하거나 혹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자들이 많아지게 되면 불교는 현실성이 없는 종교로 인식되어 세상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는 분명히 불법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경전에서 차별심을 버리라고 한 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진리의 세계 즉 깨달음의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양단을 놓아야 하므로 차별심 분별심은 물론 최후의 인식마저도 놓아야 한다[一亦莫守].

왜냐하면 깨달음의 경지는 양단의 견해를 초월한 절대 평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진리의 세계가 아니요 업보로 인하여 생겨난 차별의 세계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차별상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차별하되 차별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구분하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여 상황에 맞게 행동하되 마음 속에 차별이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심 없이 세상을 사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방법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이 세상이 연기로 이루어진 허상임을 깨닫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으로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아가 좀더 적극적인 자세인 몽중대작불사(夢中大作佛事)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산다면 수행자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며 세상은 극락과 같이 바뀌게 될 것이다.


출처: Buddha indramang(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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