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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 강의: 중관학의 성립과 전개 (by 양승규)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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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의 성립과 전개


양승규/중앙 승가대학교 강사

 

1. 중관학의 성립과 전개

티벳불교는 현교의 전통에서 불교논리학 · 반야학 · 중관학 · 아비달마 등의 불교교학을 승원에서 수학하는 방식으로 전승하고 있지만, 그 교학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중관학이다. 티벳의 학승들에게 당신의 전공분야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중관학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티벳불교는 중관학의 측면에서 모든 불교를 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관학파 중에서 티벳불교는 귀류歸謬논증중관학파를 계승한다. 이 귀류논증중관학파의 교학을 근거로 현교와 밀교를 배우고 닦게 된다.

 티벳불교가 중관학적인 바탕에서 현교를 섭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티벳에 불교를 전해준 많은 논사들의 영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후반의 불교유통사에서 티벳은 샨타락시따(Śantakrakṣita)와 까말라쉴라(Kamalaśila) 등 중관학파의 거장들이 불교교학을 전했다. 또 훌륭한 티벳학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진솔하게 접근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티벳의 중관학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 결과는 위대한 학승들의 저술 곳곳에서 등장한다. 본고는 티벳에 전해진 중관학과 그것을 토대로 발전시킨 티벳불교의 중관학을 조명하고자 한다.

 

(1) 용수龍樹의 생애와 저술

용수보살의 생애에 대해서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수보살전등에 실려 있지만, 티벳문헌에서는 대부분 부뙨(Bu ston)불교사를 근거로 한다. 논사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약 400년이 지났을 때 태어났다. 인도 남부에 있는 베다르바(Bedarbha)란 곳에 바라문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 100명의 바라문에게 설법을 청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여 50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자 관상가에게 보였더니 7일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다시 100명의 바라문에게 법을 청하면 7개월을 살 수 있고, 100명의 비구에게 법을 청하면 7년을 살 수 있지만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7년이 가까워 오자 부모는 아들의 나이가 드는 것을 보지 못해 시자를 딸려 유랑을 떠나보냈다. 일행이 날란다(Nalanda)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다(Veda)를 암송하자 그곳에 머물고 있던 바라문인 사라하(Saraha)가 듣고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듣고 난 논사는 출가하면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서는 출가시켰다. 논사는 무량수불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여 죽음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났고, 날란다 주지인 라훌라바드라(Rāhulabhadra)를 스승으로 비구계를 받고, ‘복덕을 가진이란 이름을 받았다. 그 후 날란다에 머물면서 수학했고, 여러 사람들과 대론하여 이름을 널리 알렸다.

법을 설할 때 속인 복장으로 참석하는 두 사람이 용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용궁으로 갔다. 용궁에서 많은 용들에게 법을 설하고 십만송반야경등을 사람의 땅으로 모셔왔기 때문에 용수라고 했다. 신변神變과 설법 등으로 셀 수 없는 사람을 인도하고, 수많은 탑과 사원을 건립했다. 특히 대승의 가르침이 쇠퇴해 가는 것을 보고 바로 세워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다.

논사는 세 번에 걸쳐 법을 설했다고 한다. 첫 번째의 법은 성문장의 가르침을 완결한 것, 두 번째의 법은 중론육론中論六論등 심오한 공성을 설한 논서를 저술한 것, 세 번째의 법은 대고大鼓등의 경을 토대로 여래장 · 법성 등을 찬탄하는 것 등을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논사의 저술은 다양한 방면에 걸쳐 진행되는데, 의부에 관련된 것으로는사람을 치료하는 물방울』•『향조합법』•『연금서등이 있고, 불교 내전으로는 도간경』•『연기경등 경에 대한 주석서 등이 있다. 특히 심오한 중관의 도를 확정하는 구경의 말씀으로는 중론』•『육십송여리론』•『공칠십론』•『회쟁론』•『광파론』•『보행왕정론의 여섯이다. 중론에 대해서는 여덟 가지 주석서가 있다고 하지만, 티벳어로 번역된 것은 무외소』•『불호주, 청변의 주석인 반야등론, 월칭의 주석인 명구론의 넷과 반야등론에 대한 관서의 주석이 남아 있다. 공칠십론』•『회쟁론』•『광파론에 대해서는 자주가 있고, 육십송여리송공칠십론에 대해서는 월칭의 주석이 남아 있다.

 

(2) 중관학파의 성립

중관학파라고 할 때의 중관을 청변 논사는 양 극간을 버린 중간과 같기 때문에 중관이다.”고 하여, 있음과 없음의 양 극단을 버린 중간을 중관이라고 설명한다. 있음은 일체법이 승의에서 성립한다고 하는 유변有邊이고, 없음은 명칭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단멸견斷滅見이다. 이 유변과 무변의 양 극단을 극복하고 일체법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관학파다. 중관학파는 연기하는 것은 실체가 빈 실사實事를 가진 것이고, 실체가 빈 것도 연기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작용하는 성질이 빈 실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인을 토대로 실체의 자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상단의 양 극단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중관이라고 하는 것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에 대해 실체로 성립하는 자성이 미진 정도도 없는 것과 이것에는 발생되는 것과 발생하는 것, 부정되는 것과 정립하는 것 등 윤회에서 벗어나는 모든 체계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중관학파는 용수의 제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그 중에서 아르야데바는 용수와 더불어 근본의 중관학파라고 한다. 근본의 중관학파라고 하는 이유는 이후에 전개되는 자립自立논증파와 귀류歸謬논증파를 일부를 간직한 중관학파라고 하는 것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용수와 제바 두 사람의 궁극적인 의도는 귀류논증파의 교설에 머물지만, 언설로서 실사를 자상으로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외부의 대상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것의 측면에서 대론자에게 비량이 생길 수 있는가 없는가 등의 체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립과 귀류 두 가지의 일반적인 것에 머문다는 점에서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중관학파는 중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라 갈라진다. 먼저 불호는 중론에 대한 주석서인 불호주에서 귀류歸謬논증을 통해 주석하고 자립自立논증의 인을 설명하지 않았다. 귀류논증은 대론자가 인정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대론자 자신에게 알려진 세 가지 조건의 인을 통해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비량比量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립논증은 대론자가 인정한 것뿐만 아니라 주장하는 토대에서 실사의 본질을 논자와 대론자 모두에게 착각 없는 바른 인식[]과 상응하는 유법有法으로 증명하고, 그 유법의 측면에서 인의 이치가 성립하는 것을 확정하여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비량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후 청변 논사는 불호 논사의 주석을 비판하면서 자립의 인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자립논증파의 개척가가 된다. 그 후 월칭 논사는 불호에 대한 청변의 비판이 타당하지 않은 것과 자립의 인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용수보살의 의도를 귀류논증방식으로 주석하는 대 논사가 되었다. 그 후 자립논증파는 청변에 의한 경량행經量行자립논증파와 적호에 의한 유가행瑜伽行자립논증파로 갈라진다. 경량행자립논증파는 실사의 체계를 경량부처럼 근식根識의 대상을 극미가 쌓인 외경外境이라고 하여 외경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증自證을 인정하지 않지만 외경은 자상으로 성립하는 것을 인정하는 중관학파이다. 유가행자립논증파는 실사의 체계를 유식학처럼 외경을 인정하지 않고 자증을 인정하는 중관학파이다.

 

(3) 요의경了義經과 불요의경不了義經

대승경전은 소승경전과 달리 경을 설하는 주체와 내용 등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경을 궁극적인 가르침을 설하는 경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진여를 깨닫고자 하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고, 여러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이 시설되기 때문이다. 또 있는 것과 없는 것, 실체와 허망한 것 등 여러 가지를 통해 법을 설명한 것에 대해 지혜가 하열한 중생들은 착각하여 불요의경을 요의경이라고 하거나 요의경을 불요의경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전을 근거로 심오한 의미를 추구해야 하는가? 요의의 말씀을 근거로 진여를 깨달아야 한다. 용수보살은 구체적으로 전거를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이를 보여주고 있고, 월칭과 관서 등은 무진혜경無盡慧經을 근거로 한다고 그 전거를 밝히고 있다. 이 경에서는 요의경이란 무엇인가, 불요의경이란 무엇인가? 경 중에서 세속제를 설명한 것을 불요의라고 한다. 경 중에서 승의를 정립한 것을 설명한 것을 요의라고 한다. 경 중에서 여러 가지 단어와 글자를 설명한 것을 불요의라고 한다. 경 중에서 심오한 것, 보기 어려운 것, 깨닫기 어려운 것을 설명한 것을 요의라고 한다.”고 한다. 요의경은 그 자체로 진실한 의미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해 도출되지 않는다. 불요의경은 이와 반대로 설명한 그대로를 취할 수 없는, 밀의를 설명하고 나서 다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승의를 주로 설한 것이 요의경이고, 세속을 위주로 설한 것이 불요의경이다. 깨닫기 어려운 의미인 희론을 없애는 맛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이 요의경이고, 단어와 글자를 통해 세속을 설명하는 것이 불요의경이다.

, 세속과 승의를 설하는 방식에 대해서 동경에서는 경 중에서 자아 · 유정有情 · 목숨 · 기르는 것 · 남자 · 사람 · 의생意生 · 원시인 · 작자作者 · 수자受者를 여러 가지 언어로 설명하고, 자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 있는 것처럼 설한 것을 불요의라고 한다. 경 중에서 빈 것과 무상無相 · 무원無願 · 무행無行 · 무보특가라 · 무아 · 해탈문을 설한 것을 요의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법을 말씀하신 것은 해탈을 성취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세속제만을 수습하는 것에서 진여를 획득할 수 없고, 그 이외의 것을 끌어와서 진여를 추구하여 수습해야 한다. 따라서 무아 · 무생 등 희론을 끊는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요의경이고, 자아 등을 설명한 것은 불요의경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무아와 무생 등은 승의이고 자아와 발생 등은 세속이다. 요의경은 글자 그대로이기 때문에 경에서 무생, 무인을 설한다면 생성과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립논증파에 따르면 십만송반야경과 같이 경 중에서 부정되는 것에 승의의 한정어를 직접 결합한 단어가 보이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요의이고, 반야심경과 같이 한정어를 명확하게 덧붙인 단어가 없는 것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을 끌어와야 하는 불요의라고 주장한다. 또 유식학파는해심밀경을 근거로 중간의 법륜을 불요의라고 하고, 세 번째의 법륜만을 요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반야경에서 형색이 없고, 형색의 발생이 없다.”고 하는 것 등을 설한 것은 요의경이 아닌 것이 되고, 글자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대부의 반야경에서 그것도 세간의 언설에서 그런 것이다, 승의에서는 아니다.”고 하여 부정되는 것의 한정어를 붙인 것뿐만 아니라, 한정어를 덧붙이지 않은 것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귀류논증파가 반야심경등과 같이 부정되는 것에 승의의 한정어를 직접 덧붙이지 않은 중간 법륜에 해당하는 경도 십만송반야경과 같이 승의의 한정어를 명확하게 덧붙인 경과 일치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요의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형색이 없고, 소리가 없다라고 하는 등의 경전어로 형색과 소리 등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설명한 것은 글자 그대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용수 논사가 인연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실체의 자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순되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중론등 논리의 자량으로 요불요了不了를 구분하는 개척가의 교의와 요불요를 구분하는 방식도 무진혜경을 근거로 하여 용수 스스로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알아야 한다.

출처: http://donghaksa.or.kr/new/donghakji/tong_0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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