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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 강의: 자립논증 중관학파 (by 양승규)

티벳 불교와 문화..../by Scrap

by O_Sel 2011. 12. 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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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논증 중관학파

양승규/중앙승가대학교 강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티벳불교는 교학의 근원을 귀류논증중관학파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귀류논증중관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립논증중관학파의 교학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한다. 불교 내외의 여러 부파의 교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인 둡타(Grub mtha', 宗義)에서는 불교의 부파를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唯識, 중관中觀의 4대 부파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4대 부파의 교의체계에서 아래 부파의 교의는 다음 부파의 교의를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이것은 둡타문헌에서는 중관학을 토대로 불교교학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부를 경량부가 비판하고, 경량부를 유식이, 유식을 중관에서 비판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중관학도 자립논증파를 귀류논증파가 비판한다는 점에서 귀류논증중관학파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립논증중관학파의 교의체계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1. 자립논증중관학파의 정의와 갈래
‘자립논증중관학파’라고 할 때 ‘자립논증’에 해당하는 원어를 범어로는 ‘svatantrika’, 티벳어로는 ‘rang rgyud pa’라고 볼 수 있다. 원어를 그대로 옮기면 ‘자상속自相續’ 정도로 번역된다. 인식하는 것을 자상속에 세운다는 점에서 ‘자립’인 것이다. 자립은 귀류歸謬와 대비된다. 귀류는 상대방이 인정하고 있는 것에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논증하는 것이라면, 자립은 인의 세 가지 조건인 종법宗法·수순隨順·차견遮遣을 통해 제법의 실체가 없음을 증명하는 비량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의 세 가지 조건은 타당한 인의 조건이다. ‘만들어진 것’이란 인을 통해 ‘소리가 무상하다’는 것을 논증할 경우 ‘만들어진 것’이 주제의 유법인 소리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 종법이고, 만들어진 것이 동류同類인 무상한 것에만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 수순이고, 무상함의 이류異類인 허공 등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차견이다. 따라서 주제의 유법 상에서 인을 파악하고, 수순과 차견의 관계를 기억한 후 정립되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 비량이다.

자립논증중관학파에는 경량행經量行자립논증중관학파와 유가행瑜伽行자립논증중관학파 둘이 있다. ‘경량행’이라고 한 것은 경량부처럼 근식根識의 대상으로 극미가 쌓인 외경外境의 사물을 언설로 인정하기 때문이고, ‘유가행’이라고 한 것은 언설로 외경의 사물이 빈 유식학파의 이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1) 경량행자립논증중관학파
경량행자립논증중관학파는 자립논증파의 전통에 따라 추리지推理知인 비량의 측면에서 제법의 무자성을 정립한다. 무자성을 정립하는 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과 상응하는 비유가 쉽게 성립한다는 점에서 『사택염思擇炎』에서는 ‘사구四句의 생멸生滅’을 통해 주로 논증한다. ‘지地 등은 승의勝義에서 발생하는 본성이 아니다. (주장) 만들어졌기 때문에.(이유) 원인을 가진 것 등을 나중에 인식하는 것처럼.(비유)’이라고 한다. 여기서 ‘지地 등은’은 법法인 속성을 가진 주제의 유법이고, ‘승의에서 발생하는 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정립하는 특별한 법이다. 여기서 ‘승의에서’라고 하는 것은 세속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현현하는 그대로 인식의 측면에서 시설한 것이 아닌, 실사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만들어졌기 때문에’는 이유인 인을 제시한 것이다. ‘본성이 아니다’는 것은 정립定立과 부정不定 중에서 부정이고, 부정 중에서 없음부정이다. 없음부정은 자체를 직접 깨닫는 인식을 통해 부정되는 것만 이해할 뿐 다른 것을 정립한다거나 두 번째의 법을 직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정이다.

『사택염思擇炎』에서 제기한 논증식이 타당한 논증식이 되기 위해서는 인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첫째 조건인 종법이 성립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만들어진 것은 인과 연으로 성립하는 것처럼, 지地 등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 등은 승의에서 발생하는 본성이 아니다’라고 하는 논자의 주장에 대해 혹자는 인정한 것, 현량, 세간에 알려진 것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그 주장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정한 것과 모순되는 것은 경에서 사대四大와 오온五蘊 등의 법과 정의 등을 설명하기 때문이고, 현량과 모순되는 것은 근현량을 통해 사물의 자상自相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모순되는 것은 지 등이 견고함 등의 본성을 가지는 것은 수드라 이상의 모든 세간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논자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상의 힐난에 대해 논자는 인정한 것과 모순되는 것에 대해서는 ‘승의에서’라고 하는 한정사를 결합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고 한다. 세존께서 제법의 본성과 정의를 세우는 것은 세속에서 하신 것이고, 승의에서는 본성이 없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반야경에서도 “교시가여! 일체법은 본성이 빈 것이다. 일체법의 본성이 빈 것은 무실재다. 무실재인 것은 반야바라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근현량은 안질眼疾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진 것과 같은 것을 보는 것처럼 자성을 추구하는 것을 속이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셋째, 세간은 혼몽하기 때문에 자성을 추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고 한다.

자립논증중관학파는 ‘승의에서’라고 하는 한정사를 통해 세속을 살리면서 승의에서 실체가 있음을 논파한다. 이 경우 ‘승의’의 의미는 ‘승의와 상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여를 이치에 맞게 분석하는, 듣고, 생각하고, 수습하는 지혜 이상인 진여를 현관하는 것과 상응하는 지혜를 승의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상응하는 승의인 추리지의 측면에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로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승의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싹 등이 실체로 성립한다면 진여를 분석하는 추리지의 측면에서 성립해야 한다. 싹이 실체로 성립한다면 싹의 본질에서 성립해야 하기 때문이고, 추리지는 본질을 파악하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제二諦를 구분하는 토대는 인식되는 것인 소지所知이고,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 둘이다. 세속제와 승의제 둘은 동일한 본성에 반체反體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무상한 것과 만들어진 것은 동일한 본성이지만 무상한 것과 만들어진 것은 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동일한 본성에 반체가 다른 것이다. 만약 이제가 동일한 본성이 아니라면 싹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싹에 대한 실집의 증익을 끊지 못하는 등의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고, 반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면 중생도 승의제를 현량으로 증득하는 오류 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승의에는 실제의 승의제와 상응하는 승의제가 있다. 실제의 승의는 둘로 현현하는 희론과 실체의 희론 둘을 벗어난 법성이고, 상응하는 승의는 분별을 가진 추리지의 측면에서 실체의 희론을 버린 것으로, 둘로 현현하는 희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체를 직접 인식하는 인식에서 둘로 현현하는 것을 가지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세속제이고, 자체를 직접 인식하는 현량에서 둘로 현현하는 것이 소멸된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승의제라고 한다.

2) 유가행중관학파
유가행중관학파는 양립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유가행파와 중관학파라고 하는 두 철학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중관학파의 측면에서 유가행파의 교의를 수용하는 방식이다. 유가행파의 교의는 세속제인 언설의 차원이고, 중관학파의 교의는 궁극적인 승의제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유식의 이치를 토대로 사람의 무아와 이공二空의 진여를 결택하고, 이와 같은 이치를 하나와 여럿의 자성을 여읜 무자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유가행중관학파다.

자립논증파란 점에서 유가행중관학파는 인을 통한 추리지로 일체법의 무자성을 논증한다. 까말라쉴라는 무자성은 논증하는 인을 유무有無의 발생을 부정하는 것, 사구의 발생을 부정하는 것, 하나와 여럿을 여읜 것 등 여러 가지를 들고 있다. 『중관장엄론中觀莊嚴論』에서는 그 중에서 하나와 여럿을 여읜 인을 토대로 논증하면, ‘자신과 타인이 말하는 실재는 자성이 없다. 진실로 하나와 여럿의 자성을 여읜 것이기 때문에. 영상처럼.’이라고 한다. 여기서 인을 통해 주장명제를 정립하는 방식에는 주장의 속성을 증명하는 것과 충족을 증명하는 것 둘이 있다. 주장의 속성을 증명하는 것은 진실로 하나를 여읜 것을 증명하는 것과 여럿을 여읜 것을 증명하는 것 둘이 있다.

진실로 하나를 여읜 것은 내외의 학파가 가립한 항상한 실재가 하나의 실체임을 부정하는 것과 독자부가 가립한 사람이 하나의 실체임을 부정하는 것 등이 충족하는 하나의 실체임을 부정하는 것 등이다. 진실한 여럿을 여읜 것은 진실한 하나가 없음을 인으로 제시한 것을 근거로 한다. 충족을 증명하는 것에서는 하나와 여럿은 서로를 부정하는 모순을 근거로 한 실제적인 상위를 정립하는 것으로 증명한다.

하나와 여럿을 여읜 인을 통해 부정하는 것은 자성 즉 실체다. 중생들은 시작 없는 때부터 구생俱生의 실집實執을 가진다. 이 실집 때문에 실사의 자성 또는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고집한다. 이 고집의 측면에서 실사와 허망한 본성이 세속에 존재한다고 하고, 그 반대쪽이 인에 의해 부정되는 자성 또는 실체이다. 다시 말하면 실사에 대해 인식의 측면에서 세운 자상을 언설로 인정하고, 인식의 측면에서 시설한 것을 근거하지 않는 것이 자상의 본질로 성립하는 것을 인에 의해 부정되는 실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식의 측면에서 세운 것과 세우지 않은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술가가 돌멩이와 나뭇조각 등을 마소로 변화시킬 때, 마술가에게 돌멩이와 나뭇조각 등이 마소로 현현하는 정도는 존재하지만 마소로 집착하는 것은 없고, 마술에 걸린 구경꾼에게는 환술의 토대가 마소로 현현하는 것과 그것을 집착하는 둘이 존재한다. 그 장소에 늦게 도착하여 마술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는 환술의 토대가 마소로 현현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 둘이 없다. 그것도 마술가처럼 환술을 부리는 토대가 마술에 물든 인식의 측면에서 마소로 나타날 뿐, 그와 같은 인식을 근거로 하지 않고 돌멩이와 나무의 본질의 측면에서 마소로 현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술에 걸린 인식의 측면에서 시설된 돌멩이와 나무 자체의 측면에서 마소로 현현하는 본질은 존재한다.

유가행중관학파에 따르면 바른 인식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 인식의 측면에서 실사를 세운 것이고, 그와 같은 측면에서 세운 실사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마술에 걸린 인식의 측면에서 환술의 토대가 마소로 현현하는 것은 가능하고, 그 인식의 측면에서 세운 환술의 토대에도 마소가 현현하는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따라서 싹의 종자에서 생긴 것을 인식의 측면에서 세운 것과 싹 자체의 측면에서도 종자에서 생긴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이 학파에서 언설로 존재한다고 시설한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술에 걸린 구경꾼에게 마소로 현현하는 것은 내적인 인식으로 설정된 것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소로 현현하는 토대에서 처음부터 진짜 마소 하나하나가 대상에 물들어 존재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통의 중생들도 실재가 내적인 인식의 측면에서 설정된 것을 근거하지 않고 대상 자체의 본질의 측면에서 성립한다고 고집한다. 이것이 구생실집으로 고집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집하는 것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와 여럿을 여읜 것 등의 인에 의해 부정되게 되고, 인식의 측면에서 설정된 것을 그와 같은 논리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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